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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Sep 20. 2024

이야기를 하는 이유

정은이의 수술 일정에 맞춰 휴가를 냈었다. 수술 후 일주일 간 4시에 퇴근할 수 있도록 근무 시간도 조정해 놓았다. 수술이 취소되면서 휴가와 근무 조정은 필요 없어졌고, 팀장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 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팀장은 그 나이 대 조직장이 다 그렇듯 회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감이라는 것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듯 행동하는 측면이 있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나면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조직장 면담 중 장애인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해 가끔 이야기한다. ‘정말 힘들겠다.’, ‘너무 속상하겠다.’는 말이 뒤이어 나온 적은 없다. 회사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나, 넌 충성심이 부족하다거나, 일과 삶이 너무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 돌아올 뿐이다.


어쨌든, 휴가를 취소하기 위해 정은이 이야기를 팀장에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위로의 말을 건넨 뒤, 이번 주 월요일, 3분 지각한 사건을 덧 붙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에서 내린 시간은 9시 3분. 엘리베이터 문 앞에 전무님이 서 있었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전무의 눈빛이 나에게 머물렀었다.


정은이의 나을 수 없는 뇌종양에 큰 충격을 받은 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쳐 오르는 슬픔과 나를 둘러싼 무력감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했다. 어찌어찌 글을 한 편 쓰고 나니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글을 쓰고 싶었다. 쓰고 나면 뭐가 뭔지 모를 무언가가 더 또렷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동안 너무 가까워 관심 갖지 않았던, 엄마, 아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와 정은이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함께 하고 싶은 것, 불치병 딸과 함께 사는 엄마와 아빠의 감정이나 일상을 담아보고 싶었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두려웠다. 우리의 추억은 조각나 있었고, 그 조각을 모으는 작업은 험난할 듯 보였다. 그렇다고 조각을 모으면 누군가의 마음을 쿵 하고 울리는 멋들어진 조각상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가족의 추억을 한 데 모아 글로 남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도 생겼다.


이러한 의문과 두려움이 커질 때 즈음, 휴가 취소를 위한 면담이 있었다. 나에겐 하루 저녁을 눈물로 보낼 만큼, 월요일 지각을 할 만큼,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큰 일인데, 누군가에겐 조직원의 3분 지각보다 작은 일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놀라움은 이 글을 쓰도록 결심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하찮게 여기든, 감흥을 받지 못하든 그건 큰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특히 우리 가족에겐 더욱.


비슷한 상황에 놓은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공감과 연대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거창한 바람은 없다. 그저 나라도 치유받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쓴다. 누군가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쓴다. 더 하찮을 수 있도록 더 작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정은이에게 이 글을 써도 되는지 물어보지 않았구나. 지난번 글에 좋아요 눌렀던데… 동의한 걸로 봐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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