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을지 모르는 건 똑같구먼 뭐...
나, 짝꿍, 찐이 그리고 엄마. 그러니까… 엄마 입장에서 보자면, 아들, 아들의 배우자, 손자 그리고 나로 구성된 딱 봐도 뭔가 어색한 조합으로 천안 여행 파티를 구성했다. SST(Strong Stay Together)라 불리는 이 캠프는 ‘우리가 장애인 자녀를 2박 3일 동안 전담하여 돌봐줄 테니 엄마, 아빠는 쉬세요~!’ 프로그램이다. 사실상 찐이의 주 양육자라 봐야 하는 엄마(찐이 입장에서는 할머니)가 가야 함은 당연했지만 어색한 조합인 건 사실이다.
천안으로 내려가면서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정은이었다. 정은이는 내 여동생으로 40살이 된 지금까지 쭈욱 엄마 아빠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엄마는 가끔 나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아빠도 그렇고 정은이도 그렇고, 밥 먹고 알아서 설거지하는 꼴을 못 봤다."
“밥 먹고 둘 다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만 주야장천 하고 있어!”
정은이는 약 20년 전 뇌종양 수술을 했다. 말끔하게 제거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작은 종양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었다. 뇌에 저리 큰 종양을 가지고도 인 서울을 했다며, 종양만 없었으면 서울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말했었다. 내 생각엔 종양이 없었어도 서울대는 무리였을 것 같지만, 뭐… 정은이가 나보다 똑똑하긴 했다.
정은이의 똑똑함은 다음에 조금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 할지도 모른다) 다시 종양 이야기로 넘어가 보면, 그 종양이 커졌다. 잘라내고 방사선까지 쬐었으면 그냥 쪼그라든 채로 있을 만 한데, 기어코 몸집을 불렸다. 정기적으로 하는 검사에서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커진 종양을 발견했고, 9월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20년 전에도 했던 수술이고, 20년이 지난 지금 의료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했으니 (일론 머스크는 인류의 화성 이주를 계획하고 있고, AI가 그린 미술 작품이 대상을 수상하는 그런 세상이니) 막연히 별일 없이 잘 될 거라 생각했다.
“이번에 수술 잘 끝나면 정은이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등산도 좀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체력을 좀 만드는 게 좋겠어. 운동이 제일 중요한 거 맞잖아. 그치?”
“뭐… 그렇지…”
“정은이는 요새 어때?”
“뭐.. 그냥… 도착해서 이야기하자고.”
도착해서 이야기하자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천안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후, SST캠프는 우리에게 2시간의 완벽한 쉼을 제공했다. 이 완벽한 쉼이 완벽한 슬픔으로 바뀌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엄마의 말을 요약해 보면,
수술은 못 한다. 수술을 했다 간 죽을 수도 있다. 남은 시간이 몇 달일지, 1년 일지, 10년 일지 모르겠지만 재밌는 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좋겠다고 의사는 말한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건 없다.
나는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오늘 퇴근길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고, 6개월 후 간암 판정을 받고 1년 후 사망할 수도 있다. 70이 넘어서까지 농구한다고 유난을 떨다가 넘어져 죽을 수도 있고, 100살이 넘어서도 살아남아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기염을 토할 수도 있다.
그럼 정은이나 나나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너도 나도 자기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전혀 모른다. 정은이나 나나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 없이, 재밌는 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다 죽는 거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햇살과 바람과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사는 거다.
문제는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처럼 산다는 거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의 고마움 따위는 느끼지 못한지 오래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아이를 돌보고 쉼 없이 집안일을 하고 쉼 없이 참고 노력하며 미래에 있을 행복을 좇으며 산다,
내 감정을 숨기고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눈치 보고 내면을 보듬지 않고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을 꾸미고 내 생각보다는 남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삶을 산다.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어, 이를 재료로 내 옆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기분 좋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여, 시기하고 질투하고 짜증을 내며 산다.
이렇게 살다 보니 무엇이 중요한 지 모른다. 과거나 미래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모른다. 우린 죽지 않을 것처럼 사니까. 남의 원하는 삶보다는 내가 원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그러니 지금 찾아온 불행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나 나나 별 차이 없다.
(그러니 불치병 코스프레는 정중히 사양해야겠다. 불치병 어드벤티지 정도는 고려해 볼 만하다.)
지금 찾아온 불행은 참 슬프고 야속하다. 그러나 불행은 절대 혼자 오지는 않는다. 이번 불행은 아마도 ‘지금’이라는 행운을 함께 데려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