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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ul 14. 2019

불안과 무서움은 진화의 결과라지만 너무 무서운데...

무서움은 이기지 못해.
항상 새로운 놈이 나타나거든
단념해.



도둑이 무서운 아이

초등학교를 막 들어갔을 무렵 도둑이 무서웠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누군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무언가를 훔쳐가고, 나와 우리 가족들을 때릴 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밤에 문단속은 언제나 내 담당이었다. 문을 몇 번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무서움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도둑이 그리 쉽게 들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서움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두 번째로 무서웠던 건 '못하는 것'이었다. 는 잘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


못할까 봐 안 했던 것이 많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8비트 컴퓨터를 어디서 구해 오셨다. 전자레인지보다 더 큰 컴퓨터와 세면대 만한 모니터를 어깨에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셨다. 다른 건 안 했다. 오락만 했다. 점이 몇 개 왔다 갔다 하는 자동차 게임이 기억난다. 겜보이나 사주지...라고 생각했다. 겜보이가 아닌 8비트 컴퓨터를 선택한 아버지는 혜안이 있었다. 컴퓨터, 인공지능, 딥러닝의 시대를 그는 본


그 덕에 난 컴퓨터와 친했고, 컴퓨터를 잘하는 이미지가 생겼다. 지금은 엑셀만  수 있 선생님은 당시 '베이식'이라고 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대회에 나가볼 것을 권유했다. 난 못할까 봐 안 나갔다. 상을 못 탈까 봐 안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그때 대회에 나갔다면 인생이 바뀌었을까? 엔씨소프트가 네이버가 다음이 넷마블이 내 것이었 



난 성실하게 트랙을 달렸다.

삶을 통틀어 가장 무서웠던 건 '낙오'였다.


나는 언제나 트랙을 달렸다. 남들이 깔아 놓은 트랙을 달렸다.


좋은 고등학교를 간다. 좋은 대학을 간다. 좋은 회사를 간다. 좋은 아내를 만난다. 좋은 가정을 꾸린다. 남들이 보기에 완벽한 가정을 만든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트랙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낙오자다. 오되지 않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나보다 앞서서 달리는 놈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아졌다. 그때마다 날 버틸 수 있게 해 준 만능키는 자기 합리화였다. 남 탓, 환경 탓을 하며 합리화하며 버텼다.


'잰 머리가 좋아. 천재야.'

'잰 노력을 너무해.'

'어제 게임만 안 했어도 내가 더 잘했을 거야' '부모가 잘 살 거야. 금수저 물고 태어났지'



트랙에서 떨어질까 두렵다.

뒤쳐지는 건 자기 합리화로 버텼지만, 떨어지는 건 해결이 안 되었다.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트랙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했다. 야자를 11시까지 하고 토요일,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방학기간에도 학교에선 보충수업을 했다. 뭐 그리 보충할게 많은 지 고등학교 시절 방학은 단 4일이었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갔고, 다시 좋은 취직이라는 트랙을 올라탔다.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힘들어도 딴생각 안 하고 앞으로 달렸다. 중간중간 걷기도 하고 쉬기도 했지만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생은 마라톤?

모두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한다. 장기 레이스라는 의미일 거다. 페이스를 조절하고 길게 보며 달리는 특징이 인생과 닮았다. 그러나 인생이 마라톤이면 너무 슬프다.


다른 길은 생각할 수 조차 없다. 죽음이라는 도착지로 이르는 길이 정해져 있다. 더 멋져 보이는 옆길로 갈 수 없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길로 빠질 수 없다. 더 충만해 보이는 숲길을 선택할 수 없다. 그저 내 앞의 트랙만 달려야 한다.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길을 다른 사람의 엉덩이를 보며 달려야만 한다. 그리고 피니시 라인에 다다르면 죽는 거다.


지금까지 난 마라톤을 했다. 의심도 없었다. 다른 길로 가면 실격이니까. 다른 길은 무서웠으니까.


그러나 이젠 다른 길을 가야겠다. 숲길도 꽃길도 진흙탕도 가야겠다. 바다도 한 번 보고 등산도 한번 하고 잠시 멈춰 이야기도 좀 해야겠다. 뒤도 한번 돌아보고 싶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달리는지 한번 쳐다봐야겠다. 혼자 달리는 건지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건지 한 번 봐야겠다. 발밑도 한번 보고 내 손을 누가 잡고 있는지도 한 번 봐야겠다. 그래야겠다. 트랙만 달리는 건 지겹다. 트랙을 벗어나는 건 무섭다. 하지만 궁금하다. 호기심은 무서움을 이길까?


역시 무섭다. 무서움은 이길 수 없다. 항상 새로운 놈이 나타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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