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보고 드리겠습니다."
두터운 보고서를 끼운 결재판을 공손하게 들이 민다.
"여기 줄이 안 맞네. 이건 그래프가 낫겠어. 이건 표로 해. 하였다 보다는 되었다로 하고, 점은 빼고 여기 한 칸 띄고"
보고서의 와꾸(?)에 관해서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보고서의 파일명은 'oo현황보고_v13'이다. 얼마나 더 갈지 알 수 없다. 내 최고 기록은 v19다. 오늘 기록을 깰 수도 있겠다. 인터넷에 보면 v41도 있던데, 가능할 지도...
처음에 5장으로 가져간 간단한 보고서였다. 회장님께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위의 임원에게 제출할 보고서다. 왜 30장으로 늘어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1장으로 다루었던 내용이 3장이 되었다. 한 줄의 메시지가 그래프로 변하고 슬라이드는 3장으로 늘어났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만 떡을 했으면 좀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이 정도 보기 좋게 했으면 그만 먹었으면 싶다.
보고서의 내용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럴듯해 보이는 겉모습이 중요한가?
이 질문에 "당연히 겉모습이죠!"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 난 없을 거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회사의 보고서는 겉모습에만 치중할까? 줄글로 풀어서 쓰면 A4용지 1~2장에 다 들어갈 내용을 왜 이리 디자인하고, 그래프 넣고, 그림 찾아 넣어서 30장으로 만들어 내는 걸까? 왜 설명하지 않으면 알아먹지도 못할 축약형의 낱말들로 가득 채우는 걸까? 스티브 잡스처럼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고서를 만들다 미친 척하고 한번 물어봤다.
"부장님. 혹시 이 보고서에서 말씀하시고 싶은 메시지가 뭔가요?"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보고서의 내용이 부실할 때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다. 부실한 내용을 채우면 된다. 채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솔직히 이야기하면 된다. 내용이 부실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면 솔직히 말하고 시간을 벌자. 능력이 부족했다면 솔직히 말하고 임원의 소중하고 고귀한 조언을 구하자. 애초에 가설이 잘못 설정되어 있었다면 솔직히 말하고 가설을 바꾸자. 분석이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면 솔직히 말하고 직관을 따르자고 하자. 디테일한 분석을 할 만큼 영향력이 없는 사항이라면 솔직히 말하고 의사결정을 요청하자.
그러나 대부분의 중간관리자들은 와꾸를 그럴듯하게 짜는 것을 선택한다. 더 문제는 그게 통한다는 거다. 디자인이 잘 되어 있는, 그럴 듯 한 보고서를 임원은 좋아한다. 그래서 모든 보고서는 파워포인트로 만든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틀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H사에 다니는 대학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발령받아서 기획파트로 갔는데, 옆에 저 과장이 일 엄청 잘한다는 거야. 그래서 유심히 지켜봤지. 맨날 키보드를 엄청 두들겨. 뭘 제일 많이 두들기는지 알아? 컨트롤하고 방향키야. 파워포인트 사진, 표, 그래프 위치 계속 맞추고 있는 거지. 스트리트파이터Ⅱ 하는 줄.
그리고 그 선배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파워포인트로 보고서를 만들지 말라고 사장이 지시한 회사 있잖아? 부장 한 명이 하지 말라 그랬는데 파워포인트로 보고서 만들었다네. 그래서 잘렸어. 그다음부터 파워포인트 완전 없어졌지. 지금은 어떤지 알아? 엑셀로 파워포인트처럼 만들고 있다고 하더라. ㅋㅋ 더 빡시다네.
파워포인트로는 프레젠테이션만 하자.
임원에게 현황을 보고 한다. 고객들 앞에서 신제품을 설명하고 사라고 설득한다. 투자자에게 사업에 투자할 것을 설득한다. 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해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야 한다. 키노트나 프레지를 써도 좋다. 스토리 짜고, 슬라이드 구성하고, 사진 찾아서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한다. 이미지가 중요하다.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한다. 과도하게 애니메이션을 넣거나 끝에 박수 효과음만 넣지 않으면 된다.
보고서를 만들 때는 파워포인트를 쓰지 말자. 내용에 신경을 쓰자.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 아닌가? 디자인 좋게 만들어서 어디에 써먹으려 그러나. 다 아는 사람들끼리 그러지 말자. 가족이라며. 가족끼리는 팬티만 입고 다니고 그러는 거 아닌가? 가족들끼리 맨날 수트 입고, 넥타이 매고 그러고 다니면 얼마나 힘든가.
더 이상 PPT 보고서 버전 신기록에 도전하고 싶지 않다. 2시간에 끝날 일을 일주일 동안 붙잡고 있기는 싫다. 회사에서는 일을 하자. 스트리트파이터Ⅱ는 집에 가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