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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ul 24. 2019

조급함에 힘들 땐, 빗방울을 만나보는 게 도움이 된다.

야식으로 먹은 오꼬노미야끼가 날 빗방울과 만나게 했다.

잠시 벤치에 앉았다. 내 위엔 어젯밤에 먹은 오꼬노미야끼가 들어있었다. 먹고 바로 잠이 들었더니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 물건을 속에 담고 자느라 그렇게 뒤척였나 보다. 더부룩한 배를 달랠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오직 시간만이 필요해 보였다.


매일 새벽 달리기를 하고 있지만 오늘은 힘들다. 걷기로 했다. 평소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발은 이미 집으로 향하고 있다. 집 앞에 다다를 무렵 벤치가 보였다. 오꼬노미야끼와 인사할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잠시 앉서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여름이지만 새벽은 역시 시원하다. 머리칼 사이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느껴진다. 오늘은 달리지 않아 이 거의 나지 않았다. 람은 얼마 되지 않는 땀의 습기를 날려버린다. 귓가에 윙윙 거리는 모기 한 마리가 신경이 쓰이지만 원한다면 내 피를 내어주기로 했다. 아직 내 '위'엔 오꼬노미야끼가 남아있다. 나와 쉽사리 이별하려 하지 않는다.




떠날 생각이 없는 오꼬노미야끼 때문인지,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벤치에 내가 앉아 있는 '낯섦' 때문인지 모르겠다. 난 잠시 명상을 해보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어깨와 목의 힘을 빼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내 호흡에 집중했다. 하나... 둘... 셋.... 내 호흡을 세기 시작했다. 다섯까지 세,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이번엔 여섯까지 세고 하나로 돌아간다. 이렇게 여덟까지 세면 한 세트 끝난다. 중간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면 다시 하나도 돌아가 다섯부터 시작한다. 일단 가볍게 세 세트만 해보기로 한다.


흠... 명상이 끝나지 않는다. 호흡 수가 다섯만 맴돈다. 집요하게 다른 생각들이 내 호흡을 파고든다. 잡생각이 은근슬쩍 내 다섯 번째 호흡에 올라탄다. '어젯밤 왜 오꼬노미야끼를 먹었지...'라는 후회가, '아... 그래서 몸이 안 좋다...'라는 핑계가, '아... 이대로는 안 되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조급함이 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호흡을 점령한다. 내 호흡은 계속 다섯만 맴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세 세트는커녕 다섯의 호흡도 넘기지 못하고 눈을 뜬다. 왠지 서글퍼진다. 다섯 번의 숨도 제대로 온전히 쉬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다. 피곤하다. 눕고 싶다. 그저 멈춰버리고 싶다.


잠시 벤치에 누워보기로 한다. 딱딱한 나무가 등에 느껴진다. 20대 때 술을 먹고 벤치에서 잠들었던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음악을 튼다. 선곡은 없다.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고 첫 곡이었던 Coldplay의 'Scientist'가 흘러나온다. 어떤 내용을 노래하는지는 모른다. 멜로디가 적당하다.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밝고, 적당히 내 가슴을 울린다. 눈을 감는다.


다리가 따갑다. 간지럽다. 다리가 저린 건지, 모기 때문인지 원인을 파악해본다. 그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이젠 차갑다. 내 다리를, 내 팔을, 내 얼굴을 때린다. 차가움이, 따가움이, 간지러움이 떨어진다. 비다.


평소였으면 화들짝 놀라 집으로 뛰어 들어갔을 거다. 오늘은 일어나기가 귀찮다. 아직도 내 위에 머물러 있는 오꼬노미야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기다려보기로 한다. 비가 멈출 수도 있으니까.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그대로 벤치에 누워있다. 내리는 비가 점점 더 내 피부에 닿는다.


내 피부에 닿는 한 방울. 그 물을 고스란히 느껴 본다. 차가운지, 따가운지, 따뜻한지. 비 한 방울이 내 몸에 닿는 그 느낌을 오늘 가져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비는 언제나 피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비가 오면 당연히 난 달렸다.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서. 이렇게 온몸으로 한 방울을 느껴보긴 처음이다.


한 방울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옆에도, 그 옆에도 물방울이 내 피부에 닿는다. 간지럽다. 포근하다. 얼굴에 닿는 물방울이 마치 누군가의 손길 같다. 괜찮다고, 넌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는 듯하다.


눈을 떴다. 하늘이 보인다.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희뿌옇다. 다시 눈을 감는다. 회색 하늘이 다시 보고 싶어 눈을 뜬다. 하늘이 보인다. 내 피부에 닿는 물방울이 저기서 오는 거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저렇게 멀리서 만들어지고, 출발해서 내 피부에 닿는구나. 그리고 난 그걸 느끼고 있구나. 바로 지금 여기. 지금 여기서.


어제 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전 지금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요. 항상 고민합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지를.'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 해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날 압박하고 고민으로 이끈다.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고민하지 않기 위해 또 고민한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고민 없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날 조급함으로 밀어붙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이 또 날 조급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되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조급할 거 없어, 걱정 마"


어제 먹은 오꼬노미야끼가 날 빗방울과 만나게 해 주었다.  만난 빗방울은 내 얼굴을 만졌다. 흘러내려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이렇게 속삭였다.


자꾸 조급해지는구나.

그래서 가끔 힘들지?

지금은 어때? 지금도 조급해? 그래서 힘들어?

아니지? 걱정 마. 나랑 조금만 더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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