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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ul 22. 2019

술은 마시지만, 숙취는 거절합니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다.

(아침) 머리가 아프다. 머리 뚜껑을 열고 뇌를 꺼내 깨끗이 씻어 다시 집어넣고 싶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개.

(저녁) 멍멍. 전 개입니다. 한 잔 하시죠!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에게 매번 벌어지는 일이다. 어찌 이리 바보 같은지. 술을 마시는 순간, 불과 몇 시간 후 일어날 일을 난 확실히 알고 있다. 미래를 보지는 못 하지만 이건 보인다. 고통스러운 숙취는 나에게 필연이다. 20년간의 데이터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술을 마신다.


난 술이 좋다. 술을 끊는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가끔 술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 버틸지 생각해 본다.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떨쳐낸다.



"술 좋아하냐?"


20대. 한창 술을 먹었을 시절, 이 질문을 받으면 난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그 당시 난 이런 느낌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나 싶다.

"술은 나빠. 사람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어. 그리고 술을 좋아하면 헤퍼 보이고 가벼워 보이잖아. 그럼 안돼. 자기 관리의 대척점에 있는 아주 좋지 않은 물건이야. 술이 좋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착각일 거야. 나는 이런 물건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수준 높은 사람이어야만 하니까.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는 좋아.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지. 문제는커녕 대인관계가 내 자랑이야. 사람 사이에 소통도 무지하게 잘되는 멋진 휴머니스트거든. 그래서 술 자체보다는 술자리를 너무너무 좋아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위선적이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말이다.



30대가 갓 넘었을 무렵 어떤 술자리가 있었다. 굉장히 활발한 여성이 술자리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면 안 되죠. 그건 술에 지는 거예요. 술은 단지 매개체일 뿐이죠. 술에 당하지 말고 술을 이용해야죠~"


고객사 접대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웃고 떠드는 이유도, 기분이 이렇게 좋은 이유도 바로 술에 취해서라고!"


이 사건 이후 난 술에 대해 조금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전 술이 좋아요. 술 취한 느낌이 너무 좋거든요.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죠."


난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낮에, 카페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시원한 맥주를 좋아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순간이 인생에 몇 번 없었다는 게 문제다. 퇴사에 성공하면 이런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려나?


비 오는 날 부침개와 함께 먹는 막걸리도 좋다. 엄마의 부침개라면 더할 나위 없다.


금요일에 아이들을 재워 놓고 마시는 캔 맥주 한잔도 사랑한다. 당연히 김치냉장고에서 꺼내야 한다.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맥주 한 잔도 기분 좋다. 한 잔, 두 잔 마시면 벌써 친해진 기분이 든다.


맥주집을 오픈한 친구의 가게에서 먹는 맥주도 빠질 수 없다. 이 것 저 것 원하는 대로 준다. 이 맥주 저 맥주 맛도 보게 해 준다. 서비스 안주도 많다.


동기들과 죽을 때까지 마시는 술도 좋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까지 술을 마시다 보면 가족보다 친해진 듯한 느낌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왠지 서먹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게 함정.


친구들과 추억을 안주 삼아 마시는 술이 좋다. 매번 만날 때마다 같은 소재를 반복하지만 반복할 때마다 재밌다. 술자리가 끝나면 약간은 허무할 수도 있다는 게 함정.


마음이 울적할 때 단골 집에 가서 사장님과 이야기하며 마시는 술은 특별하다. 딱히 내 고민을 털어놓진 않지만 고민이 해결되는 느낌이다. 사실 고민은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고민하지 않고 행동할 때 해결되는 게 바로 고민이다.


가족들과 치킨을 먹으며 마시는 맥주는 진리다. 아이들은 음료수를 마시고 난 맥주를 마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위는 엉덩이 살과 갈빗살이다. 가끔 모양이 비슷해서 퍽퍽한 살을 고르곤 한다.


술을 좋아하냐고? 술자리를 좋아하냐고? 술을 왜 마시냐고? 취하려고 마신다고? 취하면 안 된다고?


정답은 없다. 그저 자신이 지금 왜 술을 먹고 있는지 알고 먹으면 된다. 요사이 난 술을 많이 줄였다. 이젠 숙취를 견디기 힘들다. 숙취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아졌다. 그래서 일주일에 1번 먹을까 말까다. 이 조차도 맥주 1~2잔이 전부다. 예전 같으면 취기가 올라오지도 않았을 양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활한 지 5개월이 되니 취한다. 참 신기하다. 맥주 500 하나에 알딸딸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효율이 올라갔다고 보면 될까?


잘은 모르겠지만, 술을 마심에 있어 진리는 딱 하나 있는 것 같다.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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