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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Aug 11. 2019

내가 지금 '열등감'을 느끼는 거 맞죠?

열등감이 핑계가 될 때 문제가 된다. 그저 인정하면 그 뿐.

그저 미소를 짓는다. 앞에서 뭐라 하든 그저 웃는다. 계속 웃는 거도 힘들다. 더 중요한 건 들키면 안 된다. 내가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30%는 거짓 웃음이라는 걸 말이다. 더 더 중요한 건 자기 합리화다. 지금 이 자리가 정말 중요한 자리라는 의미. 지금 이 자리를 나도 즐기고 있다는 착각. 지금 이 자리가 내 평판을 더 올려주리라는 믿음. 이 합리화 삼총사가 날 설득한다.



세종시가 날 부른다.


아침부터 비가 온다. 꽤 많이 내린다. 1층으로 내려왔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 우산을 챙긴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세종시로 간다. 고위공무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출장을 간다. 오송역에서 정부기관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한다. 호수에 햇살이 부딪혀 녹아내린다. 호숫가에 서 있는 아파트가 내려다보고 있다. 정말 살기 좋아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서울에서 그렇게 내리던 비가 여기선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습기만 가득 차서 땀 방울이 날아가지 않고 내 몸에 머무른다. 찝찝하고 질척인다. 짜증과 불쾌감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번 보시죠!"


나름 고위 공무원인 그는 이 한 마디로 서울에서 10명이 넘는 사람을 불렀다. 11시 미팅에서는 20분간 그의 훈시가 있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앞으로 빠릿빠릿하게 우리 요청사항 잘 들어주세요"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9시에 ktx를 타고 세종시로 10명이 넘는 사람이 내려왔다. 이 미팅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차에 오르고 30분을 내달려 공주의 어느 식당으로 갔다. 불편한 점심을 먹었다. 옆에서 어느 부장의 말소리가 계속 거슬린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은 것 같다. 하하하 호호호 웃으며 식사를 해 나간다. 톤도 그렇고 말투에서 '나 너랑 친해질래. 날 좀 봐줘.'라는 진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서울역으로 돌아오니 4시가 되었다. 사무실에는 5시에 도착한 걸로 하고 퇴근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가 매우 가치 없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가치를 찾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 소월길을 넘고 버티고개를 지나 계속 걸었다. 땀이 흘러 옷을 적신다. 가방이 점점 무거워진다. 아내에게 줄 호두과자를 괜히 샀나 싶다. 그 무게만큼만 덜어내도 조금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날 세종시로 내려간 10명 중 리더 격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세종시에서 전화가 오면 일단 짜증이 나더라고요. 우리들이 서로 연락하고 업무 요청할 때 지키는 그런 기본적인 예의,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한번 보시죠, 내려오시죠, 이렇게 하시죠. 이런 말들의 연속입니다."




내가 지금 '열등감'을 느끼는 거 맞죠?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열등감일 수도 있다. 쳐지는 감정이 자꾸 솟구친다. 존중받고 싶다는 칭얼거림일까? 난 왜 이렇게 살았을까라는 자책일까? 아니면 최소한 우리가 그들 밑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치기 어림 일까? 자꾸만 불편하다. 자신들이 어떤 요청을 해도 이 사람들은 결국은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을 거다. 잘 어르고 달래서 들이받지만 않게 다독거리면 될 거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을 거다.


"아침에 넥타이 매면서 간이랑 쓸개는 옷장에 넣어 놓는 거야. 퇴근하고 옷장에서 간이랑 쓸개를 찾아서 다시 넣는 거지. 그게 사회생활이고 회사생활이야."


신입사원 때 같이 일했던 부장님이 해줬던 말이다. 당시에는 완벽한 비유라 생각했다. 전혀 문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부장님이 어떻게 이런 감성적인 비유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 간다는 아련함을 느꼈다. 나도 가장이 되어 가고 사회인이 되어 간다는 막연한 충족감을 느꼈다.


부질없고 뒤틀린 충족감에 넌덜머리가 난다. 이런 게 가장이고 사회인이라면 하면 안 될 것 같다. 하기 싫다. 예전에 난 친구를 어떻게 사귀었지? 왜 즐거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깡그리 잊어버렸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뭐가 더 중요해졌길래 내 삶이 이렇게 바뀐 걸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진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알고 싶어 진다. 보자마자 흥미가 생기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서로 익숙해져 가고 서로에게 시간을 들인다. 그렇게 쓰는 시간들이 즐겁다. 우리는 친구가 된다.


요즘 사람들은 서로를 길들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 인맥을 쌓으려고만 합니다. 시간을 들여 한 사람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얻어내려고 하죠.

신정철, <메모 독서법>


이제 나에게 이러한 시간은 없다.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지 생각한다.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패스. 혹시 모르니 무시하진 않는다. 이익을 줄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 사람이 반드시 나를 좋아해야 한다. 난 유쾌해야 하고, 재밌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듣기 좋은 말만 해야 한다.


목적으로 사람을 대한다. 그러니 과정이 즐거울 리가 없다. 영업을 하며 만난 고객사들과의 술자리도 그렇고, 오늘의 세종시 미팅도 그렇다. 목적이 사람을 집어삼키고, 효율이 시간을 집어삼켰다. 역시 퇴사가 답인가?


내가 바뀌는 건 불편하고 귀찮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바뀌라 강요하고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만 댄다. 오늘 내가 느낀 건 피해의식이 맞다. 열등감도 맞다. 피해의식도 열등감도 나쁜 게 아니다. 더 나은 삶으로 나를 나아가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단지 이를 핑계 삼아 멈추어 버린다면 문제다. 세종시에 나쁜 놈들이라 욕하고, 내가 이렇지 뭐...라는 편한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살아 버리면 편하다. 그리고 또 이런 상황을 만나고 또 편하게 넘길 거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을 희생해서 까지 변하고 싶지 않다. 즉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거라네. 다소 불만스럽고 부자유스럽지만 지금 이대로가 편한 거지.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행복해질 용기'를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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