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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Aug 18. 2019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긴 힘듭니다.

남자는 그래야 한다고 배웠어요.


남자 새끼가 왜 이리 말이 많아.

그래 남자는 말이 많으면 안 된다.


남자 새끼가 왜 이리 눈물이 많아.

그래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남자 새끼가 왜 이리 약해.

그래 남자는 강해야 한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아버지께서 영주로 발령이 났다. 주로 내려가시는 당일,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차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장남의 보이지 않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을 거다. 내려가시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한 마디 하셨다.


“이제 네가 가장이다. 엄마 잘 지켜”


14살이 가장이라니. 40이 가까워진 지금 난 단 한 번도 엄마를 지켜본 적이 없다. 엄마의 보호를 받으며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난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14살짜리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와 여동생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난 눈물이 많다. 감동도 쉽게 받는다. 조금만 슬픈 영화를 봐도 펑펑 운다. 초등학교 시절 마이걸이라는 영화를 봤다. 마지막에 맥컬리 컬킨이 벌에 쏘여 죽는다. 그 장면에서 난 정말 펑펑 울었다.


난 겁이 많다. 7살 때 어머니는 나에게 미션을 주셨다. 계단 2칸을 한 번에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미션을 컴플릿하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2칸을 뛰면 착지 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나 보다. 최소한 염좌는 얻을 것이라 예상했을 거다. 어머니는 남자가 이것도 못 뛰냐며 답답해했다.


또 7살 때의 일인 것 같다. 난 머리를 감는 게 무서웠다. 비누가 눈에 들어가면 따갑다. 그 순간이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어머니나 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그래야 눈에 비눗물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부모님은 내가 앞으로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으면 하셨다. 7살이면 꽤 무겁다. 그 아이를 매번 무릎에 눕히고 머리를 감겨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젠 안다.


이렇게 약하고 예민한 나에게 남자라는 이유로 강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뭐… 강한 게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성 우월주의'에 대해 말하고자 함도 아니다.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로부터 집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강요당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렇게 학습되고 교육받는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대부분의 우울감은 여기서 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지 하고 참는다. 그 과정에서 감정 소모된다. 몸안의 에너지가 줄어든다.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 주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주길 바라보지만, 그런 일은 영화나 소설에서나 가능다.


회사를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소모된 감정을, 써버린 에너지를 채워 넣기가 힘들어진다.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난 지금 화가 났다고, 짜증이 났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계속 참는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참는 걸 잠시 멈추고 줄어든 에너지를 다시 채워 놓아야 하는데 채워 놓을 방법이 없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어.
조금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아.


상사가 날 힘들게 하네.
내 이야기를 조금 들어줄래.


요새 왜 이리 조급한지 모르겠어.
나 좀 도와줘.


아이와 계속 붙어 있었더니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어.
나 산책 좀 다녀올 테니 아이 좀 봐줘.


당신이 매일 늦게 들어오는 건 정말 참기 힘들어.
오늘 회식 가지 마.


집안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
일찍 들어와.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지금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그 대신 얼굴에 짜증을 담는다. 그리고 참고 또 참는다. 가슴에 화를 담는다. 그리고 참고 또 참는다. 상대방이 내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알아서 그에 맞는 행동을 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를 알아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솔직히 내 감정을 말해 본다. 힘들다고 말한다. 슬프다고 말한다. 예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 본다. 소모된 내 감정이, 줄어든 내 에너지가 다시 채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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