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한 베짱이 Nov 21. 2019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책을 읽는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문학동네, 2018.12.28

팀 페리스는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타이탄들이 공통적으로 칭찬하는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찰스 멍거의 <불쌍한 찰리>, 로버트 치알다니의 <설득의 심리학>,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칭찬하고 더 많이 인용한다.


귀가 팔랑거렸다. 눈인가? 하여튼 거론한 책 5권 중 3권을 샀다. 사피엔스는 읽었고, 불쌍한 찰리는 번역본이 없더라. 원서는 과감히 패스했 도착한 3권 중 처음으로 집어 든 책이 바로 <싯다르타>이다. 가장 얇았고, 켄 윌버의 <무경계>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으며 불교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오직 얇아서다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어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는 단 하나의 종교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책은 소설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싯다르타는 부유하다. 소위 잘 나가는 집 아이이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구도자의 길을 걷기로 한다. 그는 사색하고, 기다리며 단식하는 법을 배웠다. 고타마라는 깨달은 자를 만나 지혜를 전달받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확실해졌다. 깨달음은 누군가가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사문을 나와 도시로 간다. 그곳에서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장사의 기술을 배우며 점점 부자의 병에 걸린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참을성이 없어졌다. 불만, 나태, 상심, 몰인정이 그에게 점점 차올랐다. 그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자신을 보며 폐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로 한다.


그는 도시를 벗어나 뱃사공을 만난다. 그로 인해  판단이나 의견을 내는 법 없이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배우고, 모든 것이 현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순간 그의 아들이 나타난다.


아이에게 강요하지도, 아이를 때리지도, 아이에게 명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호의와 인내심은 아이를 더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의 끈은 아이를 속박하고, 아이는 매일같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이미 깨달은 윤회의 소용돌이에서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 그러나 뱃사공은 아들을 위해 열 번 죽는다고 해도 아이의 운명을 털끝만큼도 덜어줄 수 없을 거라 말한다. 결국 아이는 떠나고 싯다르타는 운명적인 사랑과 집착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끈을 놓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스토리를 통해 흥미를 얻는 책이 아니다. 싯다르타의 입을 빌려 헤르만 헤세의 사상이 뿜어져 나온다. 그의 생각이 흘러나온다. 여기서 독자는 감동을 얻고 깊이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자칫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책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난 아니었



ㅣ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

싯다르타는 명상, 단식, 기다림을 연습했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서 잠시 벗어나 자유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끝나면 반드시 자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깨달음은 얻을 수 없었다. 이는 술을 마시며 자신을 잠시 잊으며 얻는 위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자아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다만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의미 없는 것들은 꽤나 유혹적이다. 수동적인 여가, 아무 생각 없이 보는 넷플릭스나 TV, 술자리는 언제나 날 유혹한다. 나에게 쾌락을 주지만 이 쾌락의 지속력은 꽤 짧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은 의미 없는 것인가? 나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다 나쁜 것인가? 난 즐거운 일은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난 이미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고 있다. 단지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아채려는 노력이나 연습'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쾌락만을 주는 의미 없는 일들에 중독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이미 '무엇이 의미 없는 일인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두렵다. 이를 인정하면 난 '날 것의 나'를 쳐다보게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추악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당장의 쾌락을 버려야 한다는 아쉬움으로 자꾸만 자신을 기만하려 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더 이상 날 속이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난 이미 알고 있다. 단지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며 앞으로 올 일을 걱정하며.

 


ㅣ아이를 속박한다는 것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어떻게든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어떻게요?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훈계를 통해서?...... 아들을 위해 열 번 죽는다 해도 당신은 그 아이의 운명을 털끝만큼도 덜어줄 수 없을 겁니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보자마자 무조건적인 집착을 느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좋은 결과를 안겨주고만 싶은 대상.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힘들어도, 내가 아파도, 내게 손해가 생겨도 괜찮은 그런 대상. 인생에서 그런 대상을 만나는 것은 아이 말고는 불가능할 것 같다.


문제는 좋은 것, 좋은 결과라는 것이 아이가 아닌 부모의 입장이라는 거다. 부모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아이가 지금 가려고 하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나도 아이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다 알 것만 같은데, 깨달음을 얻은 자인 싯다르타는 오죽했겠는가. 싯다르타는 아들이 윤회의 굴레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윤회의 굴레에서 어떻게 해서든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뱃사공의 말처럼 아이의 운명은 털끝만큼도 건드릴 수 없다. 건드리려 하는 순간 부모의 호의와 인내심은 "늙은 위선자의 가증스러운 술수"가 되어 버린다.



ㅣ오직 지금 이 순간만 있을 뿐이다.

싯다르타는 그의 오랜 친구 고빈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아직 깨달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린 상태, 어떤 목표도 갖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너무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다는 뜻일까? 목표를 가지고 이를 추구하다 보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재단해서 분리해 버린다. 고빈다가 미래에 얻을 깨달음을 찾기 위해 현재를 살지 못하듯이, 현재를 살지 않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살게 된다. 고빈다는 바로 나다.


싯다르타는 그 고빈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닐세. 그럼.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전하며, 모든 죄는 이미 그 속에 은총을 품고 있고, 모든 어린아이는 이미 그들 안에 노인을 품고 있고, 모든 젖먹이는 이미 그들 안에 죽음을 품고 있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 안에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 그 어떠한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는 말과 머리로는 모순 덩어리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인 듯하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불교 신자의 99%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대부분 해탈하지 못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을 보든 '그러려니' 하고 싶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