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멈가 Feb 11. 2024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대로


수술실과 연결된 정사각형의 작은 통로.

문이 열리고 붉은 액체가 담긴 시험관이 들어온다.

나는 손을 뻗어 시험관을 꺼낸다.

시험관 뚜껑을 열고 접시에 붓는다.

현미경 아래에서 난자를 찾는다.

샅샅이.



“한 개요.”

“두 개요.”

.

.

.

“총 아홉 개 채취했습니다.”


주치의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잘 얼려주세요~”



오늘은 처음으로 난자 채취 업무에 투입되었다. 그동안 충분히 훈련해서인지 처음치고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잘’ 얼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채취 후 난자를 냉동시키고, 다음에 다시 녹여도 살아남게 하려면 아주 튼튼하게 키워야 한다.



지금부터 이 난자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을 것이다. 과연 몇 개의 난자가 성공적으로 동결될까?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난자에게 귀가 달렸다면 말해주고 싶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앞으로 상상치 못할 여정이 펼쳐질 거라고.




난임 연구원은 꽤 고된 직업이다. 초저출산 시대라는데 나로서는 실감할 수가 없다. 여긴 온통 아기를 낳기 위해 난리니까.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은 혼자 오지 않는다. 늘 두통과 함께 온다.



며칠 전 생각지도 못한 분이 안부를 물어왔다. 무려 6년 전, 첫 직장에서 만난 교수님이었다. 여전히 야생동물 연구를 하는지 궁금했다고 하셨다. 동물을 공부한다며 퇴사했었기에 나는 꽤 당황했다.



어쩌다 난임 연구원이 되었는지 설명하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게, 나는 어쩌다 난임 연구원이 되었을까?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꿈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점차 희미해진다. 어떤 여정을 겪고 이 자리에서 난자를 만지고 있는지 가물가물하다.



사실 처음엔 사육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동물을 공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육사가 아니라 동물실험 연구원이 되었다. 그쪽이 좀 더 안정적이라 그랬다. 하지만 좋아하는 동물을 가지고 실험하는데 즐거울 리 없다. 결국 퇴사하고 ‘진짜’ 동물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토록 꿈꾸던 생태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제 동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틀렸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나는 결국 난임 연구원이 되었다. 석사 과정 중 우연히 동물의 정자를 연구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간추린 이야기를 교수님께 들려주었다. 교수님은 잘됐다며 원래 인생이 그런 거라고 하셨다.


‘원래 그런 거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의미일까? 뭐,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는 한 번도 억지로 등 떠밀리거나 흘러가는 대로 산 적이 없다. 지금까지 모든 걸 스스로 선택했고, 그 결과로 이 자리에 있었다. 이건 꽤 중요한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나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니까.



걱정하지 말고 맘껏 설레라는 말이 떠오른다. 왠지 앞으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가 털만 빼면 완벽한 동물이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