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는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이다. 정확히 무엇이 노화인지, 언제부터 시작인지 정의 내리긴 어렵다. 다만, 일반적으로 근육의 질량이 감소하기 시작하는 만 25세를 기준으로 노화가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다. 25세라니, 생각보다 빠르다. 그렇다면 나는 벌써 늙기 시작한 지 10년째라는 말이다.
내 나이 30대 중반. 연장자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쓰러지고 싶다. 이제 운동을 꾸준히 가는 것만으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줄 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같은 30대와 스파링하면 편안하다. 나와 상대 모두 몸을 사려서 그렇다. 내일도 일해야 하고, 모레도 해야 한다. 다치기라도 하면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 그래서 서로 기술을 받아주기도 하며 '적당히' 한다.
반면, 20대와 스파링을 하면 그날 밤부터 몸이 아파져 온다.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탓에 그렇다. 체력은 떨어졌는데 아직 승부욕은 남아있나 보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힘이 들어간다. 무리한 결과는 역시나 근육통이다. 건강해지려고 운동하는데, 운동을 해서 몸이 아파지는 현상을 겪게 된다. 내가 느끼는 노화는 이 정도이다. 그래도 아직 견딜 만은 하다.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노화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서글픈 법이다. 생물학도로서 장점이 하나 있다면, 노화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생물이라면 늙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수년에 걸쳐 어렵게도 공부했다. 노화라는 단어가 친밀하달까? 눈가나 목에 주름도, 피부 탄력의 저하도 그러려니 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런 내게도 가족의 노화만큼은 서글프다. 자식은 부모의 시간을 먹고 자라는 듯하다. 내가 자랄 수록 부모님은 작아졌다. 그 맵던 회초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였을까? 내가 부모님의 시간을 본격적으로 빼앗아 먹기 시작한 것이. 나는 어렸을 때 밥을 잘 안 먹어서 속 썩였다. 그런 나도 부모님의 시간만큼은 잘 먹었나 보다.
엄마가 얼마나 건강했는지를 설명하려면, 나는 늘 다람쥐 사건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8살이었는지, 9살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좀 더 많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주택가로 들어온 다람쥐를, 정확히는 빌라의 지하로 내려간 다람쥐를 엄마는 소쿠리 하나로 잡았다. 뛰어 올라오는 다람쥐를 기다렸다가 소쿠리에 가둬 잡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엄마가 이제는 벌레 한 마리도 잡기 어려워졌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엄마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외면했던 것 같다. 좋은 날만큼, 힘든 날도 글로 남겨야 한다고 했던 내가, 엄마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글로 쓴 적이 없으니. 이 짧은 글에 들어간 용기는 꽤 무겁다.
노화라는 녀석이 못된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빼앗아 간다는 데 있다. 곱게 늙게 해주면 좋으련만, 왜 굳이 병을 주고 아프게 한단 말인가. 어쩌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노화를 막으려는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엔 없던 병도 자꾸 생겨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 온다고 했다.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벌레도 잡기 힘든 엄마가 아직 아빠는 잘 잡는 듯하다. 그것만큼 희망적인 게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