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업무 강도가 매일 역치를 갱신하는 탓에 퇴근 후엔 간신히 씻고 맥주 한 캔 마실 에너지만이 남아 있었다. 침대 옆에 읽다 만 책 한 권이 제발 끝내달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나는 매번 '내일은 꼭 읽어줄게...'라고 말하며 잠에 들었다.
마침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이건 실제로 계절이 바뀌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은유법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버티자며 남은 팀원끼리 으샤으샤 하다 보니, 어느샌가 미친 듯한 상황은 한풀 꺾였다. 지금도 결코 여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 역치가 상당히 높아진 덕분에 '그래, 이 정도면 할만하다' 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봄이다.
하지만 방심은 하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짧지 않은가? 회사는 절대 우리를 봄날에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머지않아 겨울만큼이나 혹독한 여름이 닥쳐올 것이다. 그저 재정비할 시간만이라도 허락되길 바랄 뿐이다.
여러 매체에서 올해는 봄이 무척 짧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런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봄을 만끽하고 있다. 때마침 다니던 헬스장이 리모델링에 들어가 문을 닫았고, 또 때마침 사내 게시판에 걷기 캠페인을 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나는 일할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어플로 측정된 걸음 수로 순위를 매겨 상품을 준다고 한다. 흥미로우면서도, 귀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국 어차피 헬스장도 못 가는데, '가볍게 걷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가볍게 걷기는 무슨. 전혀 진지할 필요가 없는 캠페인일 뿐이건만, 사람들은 순위를 의식해 미친 듯이 걷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안 걸었다가는 순위가 저만치 내려가는 바람에 쉬는 날에도 나가서 걸어야만 했다. 주최자도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캠페인 시작 며칠 만에 또 하나의 공지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무리해서 걷지 말라는 것. 하여간 한국인들은 적당히라는 게 없나보다.
공지는 별 소용이 없었다.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걷기를 시작하고, 한 동료는 안 먹던 영양제를 챙겨 먹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한 탓에 잇몸이 부었다고 한다. 하루에 이만 보씩 걷더니 그 꼴이 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최근 입병이 크게 나 물만 닿아도 따가운 중이었다.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도 한국인이었다.
걷기 캠페인, 아니 죽음의 행군에 참여한 직원들은 공통된 경험을 하고 있다. 바로 매일 밤, 프로포폴을 맞은 것처럼 누우면 기절한다는 것이었다. 그저께는 오랜만에 폰 게임을 한판 하고 자려고 했지만, 시작 화면이 로딩되는 중에 이미 잠들어버렸다.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걸음 수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체크해 보길 바란다. 퇴근길, 지하철로 5정거장 전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면 바로 꿀잠이다.
가장 많이 걷진 못해도, 가장 잘 즐기는 건 자신 있다. 매일 13,000보에서 17,000보를 걷다 보니 다양한 동물을 만날 수 있었다. 주로 보이는 건 산책 나온 강아지인데 마주칠 때마다 사진 찍는 재미가 있어, 이제는 아예 가방 속에 카메라를 챙겨 출근한다. 처음엔 견주에게 강아지 사진을 찍어도 되냐 묻는 게 어려웠는데, 모두 선뜻 허락해 주었다. 심지어는 잠깐 기다려보라며 목줄을 고쳐잡고, 각종 장기자랑을 보여주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렇게 마냥 행복해 보이는 강아지들과 달리, 하루하루 생존해 나가는 동물도 있다. 길고양이들이다. 같은 고양이지만, 그들은 우리 집에 있는 돼지냥이와 눈빛부터가 다르다. 날카로우면서도 지쳐있다.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용마산 주변에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는 주지 말라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보란 듯이 근처에서 고양이를 보살펴 주고 있다. 은신처와 사료를 제공하고, 포획하여 중성화까지 시켜준다. 야생에서 스스로 살아남도록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과 조금이나마 편히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것 중 무엇이 옳은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조용히 사진만 몇 장 찍고 갈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