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짓고는 못 사는 이유
"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라는 말 자체가 고리타분하다. 세상이 변해도 좀 변했는가? 그런데 얼마 전, "세상 참 좁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산다고 하는구나."라는 옛말이 절로 나오는 일이 있었다.
사촌 동생의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축의금 받는 일을 부탁받아, 데스크에 앉아 열심히 하객을 맞이하던 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혹시 아닐까 봐 섣불리 인사하지는 못했는데, 그가 내민 봉투를 받아 이름을 확인해 보니 생각했던 사람이 맞았다. 바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반갑게 그를 불러 어떻게 온 거냐 물었고, 그도 내게 왜 거기 앉아있냐 물었다. 알고 보니 친구와 사촌 동생은 대학 동기 사이였던 것. 세상 참 좁다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건가 보다. 나야 늘 청렴결백했기에 상관없지만, 혹여나 학교생활이 구렸더라면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이한 인연도 있다. 첫 직장에서 만난 한 박사님은 출신지가 같다는 이유로, 내게 늘 “여~ 수유리~!” 하며 인사하셨다. 좋은 이미지로 가득한 분이었지만,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은 끊겼다. 아니, 끊긴 줄 알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지방의 한 회사에 면접보고 돌아오는 길, 서울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정장을 빼입은 나를 보고 박사님은 어딜 다녀오냐고 물으셨다. 나는 곧 졸업이라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그러자 새 연구소의 연구소장직을 맡게 되었다며,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안타깝게도 생소한 분야이기도 했고, 꼭 가고 싶었던 회사가 있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박사님은 생각해 보라며 명함을 주셨지만, 연락은 드리지 않았다.
신림역 주변의 작은 골목길에서 또다시 마주친 것은 그날로부터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운 좋게도 원하던 회사에 입사하여, 연고도 없는 신림에서 자취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자취방 근처에서 또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무슨 이런 인연이….'라는 눈빛으로 반갑게 악수했다. 박사님은 근처에서 바이어와 미팅이 있어 왔다며, 다음에 다시 만나거든 그때는 꼭 밥이라도 먹자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그 뒤로 지금까지는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분명 어디서 또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군가 세다리만 건너면 대통령도 안다고 했던가.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이 땅덩어리. 정말 죄짓고는 못 살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