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의 한 실험실에서 보조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연구에 진심이었던 교수님은 해외 기관과 교류가 활발했는데, 하루는 공동 프로젝트를 위해 호주에서 한 연구원이 파견을 왔다. 그런데 그의 외모가 상당히 독특했다. 수북하면서도 잘 정돈된 수염과 팔 전체를 감싸는 형형색색의 타투들. 만약 흰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예술가 또는 뮤지션이라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그가 우리 실험실에 머무는 며칠 동안, 나는 실험 도구들 사이로 종종 그를 훔쳐보았다. 학문적인 장소에 전혀 그렇지 못한 외모. 섹시 그 자체였다. 그 뒤로 나는 은근히 그를 동경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가 파란색 라텍스 장갑을 낀 채 실험에 몰두하고 있던 장면이 사진처럼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느새 나도 수염이 제법 어울릴 법한 나이가 되었다. 늘 로망으로 간직하던 '그 일'을 해보기로 했다. 아침마다 면도해도 푸르스름하게 남아있는 수염 자국이 늘 스트레스였는데, 기르는 입장에서는 그것도 나름 복이었다. 인터넷에서 보면 기르고 싶어도 잘 나지 않아, 발모제를 바르기도 한단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수염은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자라, 2주 쯤 되자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다.
한국인이 수염을 기를 때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일까? 거울에 비치는 거지 같은 모습? 물론 그것도 쉽지 않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타인의 평가를 버텨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은 탓일까, 대부분은 '지저분하게 그게 뭐야? 밀어!'라며 훈수를 둔다. 도대체 왜들 그렇게 남의 얼굴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런 얘기를 한 200번쯤 듣다 보면, 수염이 목표 길이에 다다른다. 그때부터는 트리머를 이용해 매일 일정한 길이로 유지하면 된다.
수염을 기르고 나서 좋은 점이 있다. 바로 캐릭터가 생겼다는 것이다. 원래 밍숭맹숭하고 특징이 없는 외모였는데,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수염에 관해 얘기한다. 잘 어울린다는 그 칭찬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나를 더 잘 기억한다. 게다가 대충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스타일이 있어 보이는 장점도 있다. 아, 이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가수 김종국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가수이기 때문이다. 만약 운동선수나 보디빌더였다면, 지금처럼 많은 관심은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김종국처럼, 그리고 호주에서 왔던 그 연구원처럼, 나도 누군가의 상식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수염을 기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