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 연구원이 내게 대뜸 물었다.
"어.. 음.."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우물쭈물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외면해 왔던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내게 그 질문은 단순히 참석 희망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해외 학회에 참석하려면, 연구 결과와 성과를 정리한 포스터를 준비해야 한다. 단순 테크니션을 벗어나, 진짜 연구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선임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겐 이렇게 들렸다.
‘이제 슬슬 성과 좀 만들까?’
통상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직원을 모두 연구원이라고 부르지만, 모든 연구원이 연구하지는 않는다.
연구는 보통 교수 또는 박사에 의해 진행된다.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고, 석사 및 테크니션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연구원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직원은 사실, 절차에 따라 실험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까 박사가 장군이라면, 테크니션은 병사인 셈이다. 일개 병사인 내가 군대를 지휘하는 일은 당연히 어렵다.
문제는 어렵다고 안 할 수도 없는 것. 짬이 차면 일개 병사도 백인대장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바닥에서 도태되지 않고 십인 대장, 백인 대장으로 진급하려면 연구 성과가 필요하다.
연구는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다. 가장 먼저 주제를 찾아야 하는데, 그 시작부터 쉽지 않다. 기존에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완전 새로운 결과를 내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래서 보통은 기존 논문을 조금씩 응용한다.
늦깎이 신입으로 입사하여 그동안 연구 성과라는 압박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제 나도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고민하는 내게, 그럴 줄 알았다며 선임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좋은 아이디어 하나 줄게. 쌤 발표 들으면서 떠오른 건데. 진짜 괜찮은 것 같아. 쌤이 안 하면 내가 할 거야."
그 정도라고?
솔깃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괜찮은 주제이다.
"원래 시작은 등 떠밀려서 하는 거야~ 그렇게 한 번 하고 나면 다음부턴 할만 해. 도와줄 테니까 해 봐."
옆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선임이 말을 보태었다.
느낌이 좋다. 게다가 선임이 도와준다면..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일본 학회에 참가한 모습을 상상했다. 벌써 미뢰에서는 다코야키의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느낌이 왔다면 머뭇거리지 말 것.'
얼마 전 책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네.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마음을 결정한 내가 대답했다.
"좋다. 근데, 문제가 있어."
문제라고..?
"초록(논문요약본) 제출이 다음 주 금요일까지야."
맙소사. 어쩐지 모든 게 좋다 했어.
그제야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절대 방심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