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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채움 May 21. 2020

그래도 아름다워줘서 고마워

필름카메라_서른한 번째 롤

이번에 인화한 필름이 벌써 서른한 번째 롤이라니. 자주 들고나가지 못해 필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31'이라는 숫자가 큰 안도감으로 다가온다. 필름 카메라 중에서는 휴대성으로 유명한 미놀타 TC-1이지만 그의 주인은 나. 도라에몽 뺨치는 잡동사니 가방을 자랑하는 탓에 카메라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그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길거리에서 생존을 도모하려는 이 욕심을 좀 버리도록 노력해볼게... 필카를 위해 생존을 포기하다니 약간 예술가 같네 지금






4월 16일의 광화문. 벌써 세월호 6주기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해, 나는 대학생이었다. 학교가 광화문 근처인 탓에 집에 갈 때마다 세월호 천막을 봤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함께 추모하며 슬퍼했다. 하지만 졸업을 할 무렵이 되었을 땐 이곳이 하나의 섬처럼 느껴졌다. 일상으로 돌아가 바쁘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 버려진, '세월호 천막'이라는 섬.

그래도 오늘은 6주기니까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충격적일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점점 더 섬이 되어가고 있는 광화문을.



 



부암동의 자하문터널. 영화 '기생충' 촬영지이기도 하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가장 안 좋은 날은 흐린 날인데, 이날만큼은 구름 덕분에 기생충 느낌 낭낭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흐린 날씨에 감사하게 되다니. 별일이 다 있네.






종로가 좋다. 깔끔을 있는 대로 떠는 주제에 이 낡은 도시를 좋아한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다. 필카가 잘 어울리는 동네라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필카로 찍으니까 정말 90년대에 찍은 사진 같아서 놀랐다. 유일하게 여기가 2020년이라고 알려주는 '이마트24'야 고마워. 웨이퍼초코롤도 팔아줘서 고마워. 생리 때마다 너가 날 살린다.


퇴근길에 마두역을 지나갈 때마다 포장마차가 하나의 '섬'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사진에서 말한 '섬'말고, 넬 노래의 '섬'. 그러니까 '꽤나 조그만 어쩜 한심할 정도로 볼품없는 그저 그런 누추한 /  하지만 너의 따뜻함이 나를 스치던 / 네 평 남짓한 공간에서 조용한 웃음과 시선 슬픔을 건네주는' 그런 섬. 고된 하루를 보냈을 사람들에게 따뜻한 온도와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를 주는 섬... 밤에 유독 빛나는 주황색 빛 때문에 포장마차를 더 따뜻한 공간으로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마두역이 아닌 종로지만 여하튼간 그 주황빛을 찍을 수 있어 다행이다.






어린이대공원의 유채꽃. 그러고보면 필름카메라 + 꽃의 조화는 실패한 적이 없네. 풍경사진을 찍을 때 필름카메라 특유의 살랑대는 느낌이 좋다. 사물을 살짝 흐릿하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화시켜주는 그 느낌. '선명함'이 미덕이 되는 카메라의 세계에서 이런 질감의 사진은 더 이상 느낄 수 없겠지. 그래서 더 필름카메라가 좋아.



코로나로 인해 닫아버린 동물원. 철장 안에 손만 뻗어 보이지 않는 동물들을 찍었다. 코로나로 어느 동물원은 사자들이 굶어 가고, 또 어느 동물원은 번식을 멈춘 팬더들이 짝짓기를 시작했다는데. 이곳의 동물들은 후자이길 바라며, 구경꾼이 사라진 그들의 집에 평화와 안녕이 가득하길 바라며 찍었다. 행복해야 돼 아이들. 부디 사람 없는 이 순간을 맘껏 즐기렴.



잔디밭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 '이모, 이모'하는 거 보니 사촌 사이인 듯했다. 나와 사촌들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찰칵. 너네는 모르지, 사촌들과 유년시절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기억들로 평생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며 살게 될지 모르지. 그게 너에게 얼마나 큰 울타리가 되어줄지 절대 모르지. 알면 거기서 뛰노는 대신 엄마, 이모에게 큰 절을 해야 할 거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 이모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까망하트)


서울에 있는 놀이동산 치고 몹시 아날로그한 어린이대공원. 매점을 보는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도 난 풍선보단 먹을 거에 관심 있었다. 저기 저 구슬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호록. 바닐라 스플리트는 진리인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2020년의 봄을 즐기는 사람들. '즐겼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혼돈의 2020년이었지만. 결코 예쁜 벚꽃들이 아닌, '코로나'와 '거리두기'같은 무서운 단어들로 기억될 해지만. 그래도 그 중간중간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 사진으로 기록해두고 싶었다. '응 맞지 재난 같았지. 이게 뭔 일인가 싶었지. 그래도 우리는 울지 않았고, 되려 자주 웃었고, 드문드문 예쁜 추억들도 만들었지. '하고..





최애 필름이지만 단종되어 더는 구할 수 없는 필름. 아니 구할 순 있지만 5,500원이던 것을 3~4만 원은 줘야 살 수 있는 아그파비스타 400. 그렇기에 정말 아껴가며 찍고 있는데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그 필름을 쓴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단종 소식을 듣고 종로의 한 사진관에서 필름을 어렵사리 구했을 땐, '할머니가 줄 건 이 필름뿐이 없다. 오늘을 위해 아끼고 아껴 왔으니 천만 원에 팔거라'하고 손자에게 마지막 유산으로 남겨주는 시나리오를 꿈꿨는데 그 유산을 희생해도 좋을 만큼의 사진이 나왔다. 부드러운 질감이 좋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꽃의 색감이 좋고, 하늘빛의 그라데이션이 좋다. 왜 필름 카메라로 하늘을 찍으면 꼭 저렇게 그라데이션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궁금하진 않다. 그저 예쁜 결과물만 나오면 그만이다. 그렇다, 나는 문과다. 그래서 아빠가 나의 꿈을 좌절시키기 전까진 필름을 간직하고 있으면 5천 원 짜리 필름이 천만 원은 될 줄 알았지.  


흐드러진 벚꽃이 너무 아름다웠던 남산 둘레길. 이 길을 걸으며 '봄아, 어쩌자고 너는 이렇게 예쁘니.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예뻐버리면 어떡하니' 하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사람이 없는 평일 이른 시간에 방문했기 때문에 간신히 즐길 수 있었던 꽃놀이 었다. 하지만 둘레길을 걸으며 이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난리통에도 봄은 봄대로 아름다줘서 고맙다는 생각. 2020년 봄을 기점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이 변하겠지만, 여전히 예뻐서, 너무나도 내가 생각했던 봄의 느낌 그대로여서 고맙다는 생각. 어떤 것이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큰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변화의 크기가 큰 시기일수록 더. 그러니까 이 혼돈 속에서 너만은 여전히 아름다워줘서 고마워, 봄. 내년엔 꼭 수많은 인파 속에서, 깔려 죽을 것 같은 행복을 느끼며 너를 온전히 즐길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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