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사용 설명서
마음속이 시끄러운 날이 있다. 온갖 생각들이 각자의 무게를 가지고 앞, 뒤 없이 몰려올 때, 나는 집 안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다. 집 안에 있는 책상과 의자들 사이를 옮겨 다닌다. 누구나 각자의 고민과 일상이 버거울 때가 있지 않나. 게다가 요즘처럼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인터넷에 올리는 시대에는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게로 흘러 들어오고, 내 마음이 덩달아 출렁대기도 쉬워서 나처럼 기본값에 고민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들어온 생각들과 딸려온 감정들을 덜어낼 나름의 방법이 필요하다. 머릿속과 마음속은 좀처럼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많아서 (내 머릿속, 내 마음속인데도) 떠오르는 생각들이 '멈춰' 한다고 멈춰지지도 않고, 감정들을 동강동강 잘라내 부피라도 줄여보려 하지만 무게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책상, 다른 자리로 몸을 움직인다.
넓지도 않은 우리 집엔 책상 비슷한 것이 대여섯 개나 있다. 그 놓인 책상과 의자들에 제각각 필요한 물건들을 놓아 두었다. 이 책상과 저 책상과의 거리는 겨우 몇 발짝도 안 되는 거리지만, 책상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머릿속 생각과 마음들을 자리마다 덜어내어 나를 가볍게 하고, 어떤 책상은 노력해도 잘 되지 않던,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 글은 그런 나의 책상과 의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집 창문 앞에 놓인 책상이 2군데인데, 하나는 물감과 색연필과 마카 같은 드로잉 도구들로 그림을 그리는 책상이고, 다른 하나는 pc와 아이패드가 놓여 있는 책상이다. 둘 다 창문 앞에 있는 책상이고, 그림을 주로 그리는 책상이지만, 한 곳에선 pc로 계획이나 일정을 세우고, 온라인으로 공부하거나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다른 창문 앞의 책상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책상이다. pc가 있는 책상은 너무 쉽게 온라인으로 연결되다 보니 쉬이 피로 해진다. 예전에는 이 책상에서 그림도 그리고, 온라인도 하고, 일기도 쓰곤 했는데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켜 늘 피곤함을 불러왔다. 그래서 하루 날 잡고 집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 아날로그로 그림 그리는 책상을 따로 두었다. 책상에 올려 둘 수 있는 이젤과 캔버스를 올려 두고, 물감도 종류별로 두어서 수채화로, 유화로, 색연필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책상이다.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책장에는 그동안 모아 놓은 화보집과 그림 관련한 책들만 따로 정리해 두었다.
창 앞에 pc가 있는 책상이 계획하고 배우고, 세상을 들여다보는 책상이라면, 또 다른 창문 앞의 그림 책상은 좋아하는 마음을 그리는 책상인 셈이다.
그림 그리는 책상이 있는 방의 다른 벽면에는 얇고 기다란 책상이 놓여 있다. 폭이 40cm 밖에 안 되는 좁고 긴 책상이라 책상 위에 무얼 올려 두기도 비좁다. a4지도 세로로 놓으면 꽉 채워져 버리는 그런 책상이다. 이 책상에서는 주로 기록을 한다. 나의 어제를 기억하거나, 지금을 기억하여 붙잡아 두는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과 마스킹 테이프, 스탬프, 스티커들이 놓여있는 책상이기도 하다. 책상은 좁지만, 벽면에 선반을 만들어 두어 김신지 님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책이나, 조재형 님의 '하우 투 딴짓'같은 책들과 함께 둔다. 이 책상을 놓고서 매일을 기록하는 습관을 얻었다.
방에서 방으로 건너는 사이 작은 공간에는 커다란 빈백을 두었다. 그 양쪽 벽에는 단단한 5~6개의 선반을 만들어 책들을 꽂아 두었다. 그곳에는 좋아하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빈백은 눕다시피 앉는 의자라 그 자리로 옮길 때면 다시 일어나기 귀찮아서 커피를 챙겨 간다. 선반 한 쪽에는 책을 볼 때 줄을 긋거나 적을 수 있는 메모지와 필기구가 놓여있다. 매달 좋아서 구입한 책들 사이에서 내 마음을 찾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은 책들은 놓아두고 나른한 낮잠을 즐기기도 하는 자리다.
거실 한 켠에는 좌식 의자가 놓여있다. 그 뒤에는 비스듬한 책장이 있는데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들만 따로 놓아두는 곳이다. 거실 창문 앞이라 햇살이 유독 좋아서, 그 의자에 앉으면 햇살 받으며 멍을 때리기에 더없이 좋다. 햇살이 좋거나 달빛이 좋은 날에는 거실 창문을 열고 그곳에 우리 집 온 식구가 앉아 하늘을 구경하곤 한다. 샷시 홈 때문에 엉덩이가 아파서 기다란 나무판자를 잘 대패질해 창문 옆에 세워 두었는데, 창문을 열고 그 나무판자를 깔면 그대로 벤치가 되주어서, 우리 식구 모두 앉아 한참은 수다를 떨어도 엉덩이가 배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때때로 햇살과 바람의 소리를 듣고, 그림책 속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걱정이 많고 마음이 무거운 날 우리 집 곳곳을 돌고 나면, 시끄러웠던 마음이 잠잠해지고, 무거웠던 머릿속이 각각의 책상에서 무어라도 하다보면 조금씩 가벼워진다. 혼자 어찌하지 못하는 내 머릿속, 마음속 무거움을 자리마다 공간마다 덜어 놓는다. 그렇게 덜어낸 나의 이야기와 그림들이 시간이 지나 쌓이고 나면, 어느 날엔가는 나만의 이야기와 그림들이 차곡차곡 만들어질테지.
오늘도 우리집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나를 옮겨,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한다.
그런데 머리와 마음은 좀 가벼워졌건만 나의 몸은 언제쯤 가벼워질까?
오늘이 남은 인생 중 가장 가벼운 날일려나.
머릿 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집 안에 공간을 나누어 보세요.
가끔은 내가 있는 환경을 바꿔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