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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Sep 30. 2018

003.겨울나기

#백편의에세이 #조심하며씁니다.

고무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 봄쯤이었다. 


고무나무 전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장미 허브를 들여다가 얼마 안가 말려 죽이고, 또 사들여서 과습으로 죽였다. 제 운명도 모르고 내 손에 들어와서 하나둘 죽어 나가는 게 안타까워 ‘다시는 내 손으로 먹이고 키우는 것은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다 재작년 봄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인도까지 죽 늘어선 어느 화원의 작은 화분을 보며, ’이 작은 식물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 얘는 튼튼해요?” 


작은 고무나무는 행여 눈길이 조금 덜 가도 끄떡없을 것처럼 이파리 하나하나가 다부져 보였다. 빨갛게, 이제 막 태어난 흰 강아지의 꼬리처럼 생긴 새순은 웅크릴 새가 없이 돋았다. 그리고 활짝. 매끄러운 이파리가 되어 해를 받을 채비를 했다. 해를 쫓아 고개를 돌린 모습을 볼 때면 블라인드를 열어 빛을 더 들이기도 하고, 조금 풀이 죽은 것 같으면 창문 사이로 바깥바람을 들이기도 했다. 


걱정도 했다. 내 새끼손가락만도 못한 줄기에 비해 이파리가 하는 일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이파리는 제 줄기가 하는 일엔 관심이나 있는지 채 버틸 힘이 생기기도 전에 자꾸만 위로 치솟았다. 잘 자라도 타박이다. 그러나 줄기가 채 굵어지기도 전에 대가리에 이파리만 무성한 것을 보고 웃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저러다 픽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멀쩡한 나무 옆에 젓가락을 세워둘까 궁리하기도 했다. 


이파리 하나가 제 몫을 하기가 이리도 빠른 일이라니. 이 조그만 게 더 솟을 힘은 어디서 벌어오는 것인지, 어쩌자고 이파리를 이리도 작심한 듯 꺼내 놓는 것인지. 나는 자주 감탄하고 궁금해했다. 염려 건, 감탄이건 이동할 수 없는 작은 존재와 손발을 움직일 수 있는 나 사이에 대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날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나는 아주 기꺼웠다. 


그 후로 내게 식물을 집에 들이는 일은 다른 어떤 것을 사들이는 일보다 기대되는 일이 되었다. 나는 종종 화원 바깥에 내놓은 화분들을 보며 그것들이 지나온 시간을 가늠해보곤 했다. 굳이 꽃을 피우지 않아도 좋았다. 식물이 저마다 다르게 사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상냥한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조금 망설인 끝에 3년은 족히 살았을 것 같은 커다란 고무나무와 이파리가 많은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를 더 사들였다. 새로 들인 고무나무는 몸집만큼이나 새순의 크기도 커다랗고, 이파리는 검 초록빛을 띠는 것이 강하고 질겨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고무나무는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반드시 새로운 이파리를 피웠다. 나는 삶에 그토록 열심인 모습이 마치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땀을 흘리지 않는 동물. 새잎을 감싸고 있다가 끝내는 떨어지고 마는 누런 껍질은 흡사 동물이 제 덩치를 밀어내고 남은 잔해처럼 보였다. 


매미가 사라진 껍데기, 뱀이 빠져나간 비늘, 새잎이 벗어 놓은 껍질은 모두 급작스레 뛰쳐나간 것이 아니라 긴긴 시간 조금씩 달라진 것, 나였던 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 돌던 피와 물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단호한 결심의 마지막 모습. 그러니 모두 같은 것이다. 식물에게 껍질은 있는 힘을 다해 내뱉는 말 한마디일지도 모른다고, 조용한 것들도 내내 입을 다물다가 결국 말 한마디를 한다고. 그것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위로 솟는다고. 그 무렵의 나는 소리를 내지 않는 존재를 더 믿고 싶었다. 


고무나무가 자라는 사이 잎사귀가 많은 이름 모를 나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앓기 시작했다. 화원 아주머니가 당부한 대로 흰 벌레가 생긴 것은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물을 덜 줄기도 하고, 다시 더 주기도 하고, 여름에는 선풍기 바람을 쐐 주기도 하고, 영양제를 꽂아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나무는 떨쳐내듯 이파리를 줄기째로 떨궜다. 땀을 흘리지 않고 앓는 병. 잠깐 스치기만 해도 여지없이 추락하는 병. 그렇게 몇 달을 더 앓았다. 한쪽으로 무성하던 가지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어딜 가나 잘 살면 좀 좋아.”


나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간 시간, 흰 벌레를 옮기듯 나쁜 말들을 나무에게 옮겼다. 탓한 것은 나무가 아니었으리라. 

몇 번의 계절이 달라졌다. 그간 내방 식물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대화는 오래전 사그라들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줄 알면서도 사라지게 두었다. 돌본다는 마음도 그 편에 딸려갔다. 식물 따위 저러다 죽어도 제 팔자. 대개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 

식물 앞에서는 마음껏 안일할 수가 있다. 양껏 나빠질 수 있다. 게다가 도무지 죽어가는 이유를 알 도리가 없는 식물 앞에서는 얼마든지 변명도 할 수 있다. 그 무렵의 공기와 더불어 내 마음에도 추위가 스미고 있었다.


“못 하겠어요.” 


차가워서, 품고 있기가 괴로운 말을 겨우 내뱉었다. 내게 ‘못 하겠다’는 짧은 말은 일도, 딸 노릇도, 애인 노릇도, 친구 노릇도, 당장 며칠 후면 물을 주고 집안에 해를 들이며 식물을 돌보는 노릇도 못 하겠다는 긴말이기도 했다. 말을 하고 나면 따뜻해지려나 했는데 외려 얼어붙었다. 

분주해야 할 평일 오후에 혼자인 시간,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시간, 새겨지지 않는 시간, 안부를 묻지 않는 시간, 그런데도 해야만 하는 것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시간, 뒤척이는 시간,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시간. 겨울이었다.


겨울이 되면 고무나무는 입을 다문다. 겨울 해가 제 몸을 아무리 비춰도 봄과 여름 해만 받아 삼킨다. 식물들은 어찌나 정직한지, 작은 고무나무도 큰 고무나무도 모두 제 몸에 겨울을 새긴다.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잎사귀가 정렬된 줄기 위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빈 줄기가 이어지고, 죽어가는 것인지 이제 막 태어난 것인지 알 수 없이 누런색을 띠는 잎사귀 한 장을 겨우 바깥에 내놓는다. 태어나길 잘못 태어난 잎사귀, 고무나무의 실수. 이들에게 겨울은 이런 것이다. 돌연 멈추는 때, 말하지 않는 때, 좋은 것만 삼키는 때, 함부로 만들지 않는 때, 다음 봄을 기다리는 때. 


그런가 하면, 죽을 것처럼 살던 이름 모를 나무는 마른 가지 속 아직 살아있는 구멍으로 작은 잎을 밀어냈다. 저놈이 죽고 나면 빈 흙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한 것이 무색할 만큼 작은 잎은 곧 모양을 갖추었고, 얼마 안가 무리를 이루더니 보란 듯이 허공을 점령했다. 이 나무에게 겨울은 여전히 사는 때, 제 속에 살아있는 구석을 찾는 때, 지난 계절 떨군 잎들을 만회하는 때이다. 

어떤 가지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시기도 있다고 했고, 어떤 가지는 살아있는 구멍으로 밀어내라고 했다. 이들은 각자의 겨울을 산다.


때로는 누구나 방향키 삼을만한 세상의 지침보다 그저 사는 것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내게는 빈 줄기를 만드는 고무나무와 모든 줄기를 떨구고 다시 시작하는 이름 모를 나무가 그랬다. 이것들은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을 구별할 줄 알고 움츠리는 때와 경쾌해지는 때를 알며 심지어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도 갖춘 존재다. 


조금씩 ‘이 작은 식물도 겨울을 나는데.’라는 마음이 되어 간다. 여전히 어리석고, 적당히 영리하고, 많이 복잡하고, 잠시 명랑하고, 오래 가라앉는 사람이지만, 각자의 봄을 기다리는 내방 식물의 겨울나기를 봤으니 됐다. 겨울의 한가운데를 걷는 모든 이에게 식물의 위로가 들리기를. 이들의 용기를 본받기를.


나는 겨울의 가장자리를 향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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