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편의에세이 #조심하며씁니다
아빠는 밥에 물을 부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작은 밥상 앞에 앉아 숟가락 가득 밥알을 떴다. 그 위에 김치를 올리고. 입에 넣었다. 소리가 장판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물밥이 넘어가는 소리와 김치 씹는 소리가. 보는 사람 민망하게.
어제저녁, 상수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상수 아저씨는 옆동네 초입에 사시던 아빠의 친구분이다. 아저씨의 아내는 오래전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고 검게 변하다 돌아가셨다. 그 후 시간이 많이 지나 아저씨가 새로운 분과 새출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얼마가 흘렀을까. 누구 딸이 시집을 가고, 누구 아들네가 애를 낳고, 어느 어른이 돌아가시고. 그런 소식들 밑바닥에 아저씨의 안부가 깔려있었다.
나쁜 여자 같으니라고. 아빠는 열을 올리지도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쁘다’는 말이 한동안 귓가에 생생했다. 일면식없는 누군가를 향한 말인데도 예삿말 같지 않았다. 모든 말은 나이와 성별을 타니까.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의 ‘나쁘다’와 60살을 바라보는 사람의 ‘나쁘다’는 아주 다른 거니까. 아빠의 '나쁘다'란 말도 여섯 살 아이의 '나쁘다'란 말처럼 다른 말을 대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어휘가 부족해 고른 말은 아닐테니까. 도저히 다른 말이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을테니까. 그러니까 의미폭이 좁은 말은 소용이 없었으리라. 나는 다 몰라도 감히 다 알 것만 같았다.
'나쁘다'는 말은 내게만 보이지 않는 꼬리 같은 것. 그것도 내 뒤통수에 붙어있는 꼬리. 있는 줄 모르고 살다가 그 꼬리를 내가 밟아 넘어지기도 하고, 누군가 밟아 뒤통수부터 고꾸라지는 그런 말.
사람들은 화가 나면 욕지거리를 하는데, 욕보다 오래 남는 말은 언제나 형용사다. 대상자에게 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욕은 오히려 말하는 이와 같이 산다. 개년, 쌍년, 죽일년 해도 말하는 이만 두고두고 분할 뿐이다.
그러나 형용사는 다르다. 파렴치하다, 뻔뻔하다, 야비하다 이런 말들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대상자에게 가서 철썩 달라붙는다. 그들을 쫓아다니며 떼려야 뗄 수 없는 딱지가 된다. 더 생생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있다면. 욕이 아니라 형용사를 침착하게 고르자. 그런 무서운 생각을 했다.
그 ‘나쁜 여자’가 같이 살자며 다가와 큰 빚만 남기고 사라졌다나.
‘가뜩이나’라든가, ‘하필이면'이라든가, ‘오죽하면'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만으로 아저씨의 삶이 수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가 아저씨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는 동안 이 말들이 앞을 다퉜다. 이제 막 기어 다니는 아이들을 남긴 채 아내가 먼저 눈을 감았고, 노모의 손을 빌려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야 했고, 커가는 아이들에게 아침마다 뒤꿈치를 차였고, 쉴 수 없었고, 외로움을 견뎌야 했고, 외로움 끝에 만난 여자에게 배신당했다. 게다가 속수무책으로 좁아터진 이곳. 나조차 나의 일을 모른 척하고 싶어도 남들이 다 알아서 그럴 수 없는 동네에서 함부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던 것일까. 그래서 아저씨는 오래전 타지에 터를 잡고 사는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던 걸까.
아저씨의 딸이 바닥을 기어 다닐 쯤이었다. 세 식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적이 있었다. 아저씨는 한 손으로 조그만 딸을 번쩍 들어 올리시며, 요 조그만 거 언제 크나? 은진아. 언제 너만큼 키우냐, 하셨다. 그 조그맣던 딸이 빈소를 지켰다.
엄마가 그랬다. 지난번 시내에서 아저씨를 만나 선 채로 몇 마디 나눴다고. 새벽에 자전거를 탄다고. 새벽마다 은진네 집 앞을 지나는데 불이 켜져 있는 날은 문이라도 두들겨볼까 했다고. 왜 그냥 가셨느냐고, 다음엔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고. 그러곤 오늘이라고. 미친놈. 왜 그냥 가 가길. 욕 한마디가 아빠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씨팔, 쏘주 갖구 와! 술 좋아하는 새끼 앞에 술도 한잔 안 따라 놓구! 평소 농담을 잘 던지던 아버지의 또 다른 친구분께서는 영정 앞에 소주를 콸콸콸 따라 놓았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에 쓰디쓴 욕들이 왔다 갔다 하고 답해줄 이 없는 원망만 척척 쌓였으리라.
그라목손때문이었다. 농사짓는 집이면 하나씩 가지고 있던 흔한 제초제. 치명적으로 독한 농약. 아저씨는 가슴속 갈증을 주체 못 하고, 그만 파란 농약을 들이키셨다. 일단 목구멍을 넘어가면 몇 분 안에 새파랗게 속을 태워버리는 액체. 사전은 ‘엽록체의 전자를 가로채 스스로 붕괴하도록 만든다.’ 고 그라목손을 설명했다.
아저씨는 그 밤, 형에게 전화해 ‘살아서 뭐하냐’는 비틀거리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슬픔을 잊으려고 소주를 마셨고, 소주 때문에 더 빠르게 뛰던 심장 탓에 파란 농약은 손 쓸 틈없이 금세 몸 구석구석을 돌았다고 한다. 그라목손은 아저씨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많은 것들을 빼앗고 무너뜨렸으리라.
시골 동네는 한여름이 되면 길가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 때문에 길이 좁아졌다. 그러면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제초작업을 했다. 동네 이장 아저씨 집에 모여서 농약물을 타고, 이른 새벽 뿌려 놓으면 반나절 만에 모든 잡초가 사그리 타 죽었다. 이제껏 그라목손만큼 빠른 효과를 보이는 약은 없었다고 했다.
농약의 원액은 모두 진한 색소가 첨가되어 있어서 농약을 탄 물과 안 탄 물을 구분할 수 있다. 그라목손은 살아야 할 곡식 위에 잘못 뿌리지 말라고 무섭게 파란색을 띠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어른 중 세 명은 시퍼런 그라목손을 마시고 돌아가셨다. 화에 취해서, 슬픔에 취해서, 실패에 자주 얻어맞고, 앞이 캄캄해져서. 술을 마시듯이 파란 농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위아래로 시퍼런 피를 쏟으며 괴로워하다가 돌아가셨다.
파란 농약은 더 이상 제조되지 않는다. 자살 도구가 되면서 국가차원에서 이 농약이 제조되는 것을 금지해버렸다. 아빠는 ‘상갓집 밥만 먹으면 이상하게 얹히는 게 못 먹겠더라.’고 말했다. 나는 아빠가 물에 만 밥을 먹고 뜬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릇에는 멀건 물만 남았다. 거실은 조용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새벽을 헤매던 아저씨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