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모리 Sep 25. 2018

002. 딸기 중에 딸기

#백편의에세이 #조심하며씁니다

아빠는 맛있는 과일을 참 잘 고르신다. 집에 사다 놓은 과일을 먹어보면 아빠가 사 온 과일인지, 엄마가 사 온 과일인지 알 수 있다. 엄마는 저렴한 걸 사 오는 편이고, 아빠는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을 사 온다. 아빠의 표현대로라면 ‘제대로 된 것’을 사 온다. 언제나 그랬다. 엄마는 가격에서 깐깐했고, 아빠는 품질에서 깐깐했다. 그러니 엄마는 속이기 좋은 손님이고, 아빠는 조금 어려운 손님이다.
아빠는 수박을 사러 갔다가도 수박이 영 시원치 않으면 품목을 바꿔서라도 그 가게에 놓인 가장 좋고 싱싱한 것을 골라왔고 그마저도 마뜩잖으면 과감히 다른 가게에 가서 가장 맛있는 과일을 사 오셨다. 가게를 옮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빠는 이미 어느 집이 가장 신선한 과일을 파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골 가게에 가면 실패 없이 맛있는 과일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행여 단골 가게에서 산 과일이 맛이 없었을 때는 다음번에 들렀을 때 꼭 알려주셨다. 맛이 없었다고. 까다로운 손님이지만, 어쨌거나 아빠는 단골집의 품질을 감시하면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과일을 사다 먹였다.
엄마는 아빠가 사다 놓은 과일을 손질해 저녁 밥상 끝 무렵에 내놓으셨다. 수박, 참외, 포도, 복숭아, 사과, 배, 감, 가끔 체리, 방울토마토, 바나나. 그중에서도 딸기. 딸기는 조금 특별했다. 아빠는 반짝거리는 딸기 중에서도 가장 빨갛고 사방이 대칭이며 홀쭉하지 않고 배가 통통한 것, 그리고 가장 큰 것을 골라 포크에 찍어 가장 먼저 나에게 건네주셨다.

빨개지기를 가장 잘한 딸기.
사방으로 고르게 자란 딸기.
딸기이길 가장 잘한 딸기.
딸기 중 딸기.

아빠가 건네준 ‘딸기 중 딸기’를 받아먹는 일은 어린 나에게 조금 신비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고르게 자란 딸기에 깃든 힘을 먹으면 내 속 구석진 어딘가 삐죽한 곳이 내 눈앞에 있는 이 딸기처럼 완만하고 둥글게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이상한 버릇도 생겼다. 찌그러진 딸기를 한입에 먹지 못하고, 찌그러진 부분을 먼저 베어 먹고 남은 모양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입에 넣었다. 나쁜 기운을 한 입 쪼개어 먹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딸기 의식을 치르면서 마음이 조금씩 충분해졌다.

이십 대 초중반 무렵, 나는 작은 잡지사에 취직했다. 백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았다. 어떤 바람 같은 것이 있었다. 글을 조금 더 잘 쓸 수 있을 거야. 밥 먹고 글을 쓰는 것만큼 고상한 일이 어디 있어. 우아해질 수 있을 거야. 이런 바람. 터무니없는 희망도 희망이긴 하니까.

"야!”

수화기 너머로 사장님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단행본 때문이었다. 내가 일했던 잡지사는 한때 잘나가던 시절을 지나 내가 입사할 무렵에는 서점의 잡지 평대 한켠에 ‘껴주는’ 두 권의 잡지로 근근이 맥을 이어나갔다. 사장님은 나를 비롯해 회사의 스러져가는 시절만을 목격한 당시 직원들에게 20년 전 당신의 호시절을 읊는 것이 주기적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잘 알았겠지만) 호시절은 갔고, 잡지 판매만으로는 월급도 못 주게 생겼으니 종종 단행본을 발행했다. 새로 시작한 단행본은 사장님의 전성기에 함께 했던 오래된 건축가의 전시를 기념해 내는 작품집이었다. 사장님은 여러모로 숙련된 선배들에게 여분의 일을 맡기길 실패하고, 단행본 미팅마다 이제 막 입사한 나를 대동했다. 주로 나의 역할은 협의된 내용을 대신 기록하는 일이라든가, 자료를 대신 받아넘기는 일이라든가, 그쪽은 비서가 이쪽은 내가 두 어르신의 지시를 서로에게 전하고 받은 내용을 상달하는 것이었다.

중간에서 바쁘게 비둘기 노릇을 한 결과, 두툼한 원고가 모이긴 했다. 글을 얹고, 그림을 채운 교정지를 보니 책이 나오긴 나오나보다 싶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1차 교정을 보라며 두터운 원고를 책상에 던져주었다. 그때까지 내가 교정을 본 것이라곤 건축 시방서 몇 권뿐이었다. 그것을 사장님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한다고 했다. 선배들이 가르쳐준 대로 빨간펜으로 표시해가며 한 번 보고. 파란펜으로 두 번째 보는 중 이었을 것이다. 사장님은 내가 보고 있던 원고를 빼앗아 갔다. 자신이 마지막 교정 교열을 보겠다고 했다. ‘봐야 한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쉽게 책이 만들어질 리 없었다. 암, 그럼. 책이 이토록 우습게 만들어질 리 없었다. 그날로 그 일은 내 손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책이 나왔다. 선배들은 모두 퇴근을 하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서는 날이었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사장님이었다. 책에 오타가 있다고 했다. 교정을 봤는데 왜 오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인지, 아니 답이 있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게 그 질문은 마치 문을 닫은 사람이 문을 연 사람에게 문 닫았느냐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죄송하다는 말은 아직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사장님이 화가 난 것은.

“야!”
수화기 너머로 들린 단말마의 소리가 귀를 때렸다. 곧이어 시건방지다는 둥, 감히 어른한테 대드냐는 둥, 제 잘못을 어디 나에게 뒤집어씌우냐는 둥. 아직 대꾸도 못 한 말들이 또 다른 말에 떠밀려 귓속을 쳐들어왔다.

“너 병신이야?”
나는 결국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귀에서 수화기를 떼었다. 수화기 너머 사람은 아직 분풀이 중이었다. 그 분풀이를 다 받고 싶지 않았다. 체면을 구긴 김에 화라도 실컷 내보자는 마음에 나를 바치고 싶지 않았다.
울었냐면, 아니.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이해가 되기 전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할 생각이 없었으니 서럽지도 않았다. 서럽다는 마음은 패배가 의무가 되어서 생기는 것이니까. 난 져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럴수록 화가 고개를 점점 쳐들었다. 뱃속에 심장만 사는 것처럼. 피가 끓어 생긴 그을음이 신물처럼 올라왔다. 그러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울 생각이 없다.’와 ‘눈물이 쏟아졌다.’ 사이. 그 어디쯤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안 울 수가 없었다. 딸에게 딸기를 건네던 아빠가 어찌나 안됐던지. 딸기는 또 어찌나 반짝이던지.

포크를 쥐고 있던 아빠의 뭉툭한 손가락.
포크를 쥐고 있던 아빠의 뭉툭한 손가락.
포크를 쥐고 있던 아빠의 뭉툭한 손가락
그리고 딸기.
딸기이길 가장 잘한 딸기.

제일 좋은 것을 주었던 당신의 마음이 무색하게
고작 병신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나는 당신의 정성을 다 써버렸다.
딸기 중에 딸기를 들고 있는 아빠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울었다.

다음날 회사에 나갔다.
어른이 거의 다 되어가는
아이가 거의 다 되어 간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001. 한여름의 짜장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