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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나 Aug 29. 2020

태풍이 부는 날엔 말러

음악

말러 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Gustav Mahler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1885)  


열 여덟살에 우린 처음 만났다


이 곡을 좋아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짝사랑하던 문학 선생님에게 적극적으로 알짱거린 덕분에 어느새 선생님과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고, 몇몇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중 하나가 클래식이었다. 사실 그분을 좋아하게 된 것도, 나와 너무나 비슷한 취향과 관심사 때문이었지. 시를 이야기할 때의 그 감정과 클래식에 대한 매니아적인 지식. 거기에 홀라당 빠졌던 거겠지.


아무튼, 그 때 선생님 덕분에 당시 내가 갖고 있던 최신식 MP3는 거의 백곡이 넘는 클래식 작품들로 채워졌고, 아직도 집에는 그 때 받은 음반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마음에 선명하게 와 닿아 아직까지도 종종 찾아 듣는 곡들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클래식을 좋아한다. 다만 깊이있게 공부할 정도까지의 의지는 없어서, 클래식 듣는 걸 매우 좋아하는 편, 정도로 살아가고 있다.



슈베르트의 <마왕>


아주 어릴 때부터 가곡을 좋아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음악시간에 들었던 슈베르트의 마왕에 매료돼서 주구장창 며칠 동안 그것만 듣던 때가 있었다. 그 케케묵고 오래된 음악실. 나무 장판 냄새와 먼지 냄새가 풍기던 굉장히 졸리고 따분한 낮 시간. 그 때 음악선생님이 틀어주신 가곡 하나. 그 안에는 긴박함과 불안함, 절망적이고 두려운 감정이 있었다. 곡 이야기를 들려주실 땐 마음이 저릿하게 아팠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마왕의 이야기. 마왕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것을 느낀 아들이 다급하게 아버지를 찾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목소리와 급박한 피아노 연주만으로 그 상황과 감정을 구현해내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오스트리아 작곡가 말러는 위에서 언급했던 문학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도 말러의 교향곡을 가장 많이 듣게 되었다. 내 취향과도 잘 맞는다는 걸 아셔서, 아마 선생님이 더욱 신이 나 들려주신 것 같다. 교향곡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만, 다만 그 때의 나는 쇼스타코비치를 가장 좋아했고, 말러는 그 다음이었다. 어떤 잘 정돈된 배열 속의 부드러움과 강하고 솔직하고 꾸밈없지만 절제된 에너지, 그리고 차분하게 읊조리는 서사. 그게 내가 말러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였다.


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이름부터 인상적이다. 말러가 1884년에 자신의 자작시를 토대로 작곡한 곡으로, 나이 23살이었다. 나는 처음에 바리톤 성악가인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로 그 곡을 접했고, 그 뒤로 나에게 피셔 디스카우는 최고의 바리토너가 되었다.


피셔 디스카우이어야만 하는 곡. 온통 어둡고, 연약하고 울적하며 쓸쓸하다. 겨울에 불어오는 살이 시리는 바람 앞에서 헤진 겉옷을 걸친 한 젊은이가 갈 곳과 사랑을 잃고 무엇을 해야할지 망연자실해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의 길의 끝엔 회복이 있고 희망이 있고, 나아갈 미래가 있음이 느껴진다.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다. 끝에 실날같은 벅차오름도 함께 존재하는 곡.



실연의 아픔을 담은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총 4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말러가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였을 당시에 사랑하던 프리마돈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에 상심하여 쓴 곡이라고 한다.


1곡. 그녀의 혼례가 있던 날

그녀의 결혼식 날 괴로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냈다.


2곡. 아침의 들길을 거닐며

새가 울고 햇빛이 비추는 아름다운 아침에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행복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단언한다.


3곡. 나는 타오르는 단검을 가지고

격정적인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을 담아냈다.


4곡. 사랑스러운 두개의 푸른 눈동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고 방랑의 길에 내던져진 자신, 그 방랑의 시작을 통해 조금 회복된 자신을 그린다.


내가 듣는 음반



2012년, 나의 스무살, 태풍이 세차게 불던 어느 새벽에


나는 잠에서 깼다. 방 안에 작게 난 창문이 쉴 새 없이 덜커덩거렸다. 밖에서 세차게 울부짖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 어둑어둑한 새벽 시간에 침대에 누워 낮게 깔린 바람소리를 듣고 있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아직 일어나려면 한참 남은 시간, 문득 몰아쳐오는 상실감과 막연한 우울, 그리고 울렁대는 설렘에 꼼짝없이 누워서 잿빛의 천장만 바라봤다.


그냥 그 순간에 생각이 났다. 아, 말러.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들어야겠다. 들어야겠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책장 구석에 있는 클래식 음반들을 뒤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시디 하나를 찾아서 라디오에 넣었다. 오래되어 낡은 라디오는 덜덜대더니 한참이나 걸려서 그 곡을 틀어냈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피셔 디스카우의 담담한 목소리, 관현악기의 선율, 고조되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는 어떤 상실감과 체념이 느껴지는 구간들,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거센 바람의 소리.


아, 말러구나. 태풍이 부는 날엔 말러구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지. 무엇을 해야하지. 잘 할 수 있을까.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8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순간이 눈에 보일 듯하다.



그러니, 오늘처럼 태풍이 부는 날엔

또다시 이 곡을 꺼내어 듣는다.



전날 밤, 집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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