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수련하면서 가장 많이 듣고있는 말이다.
나는 체형이 골반이 전방경사된 탓에 자꾸 꼬리뼈가 위로 들리고 아랫배가 아래로 내려간다. 애초에 복부힘이 약하고 전굴자세할 때 척추를 말아내는 힘이 부족하다. 요가를 할 때는 전방도 후방도 아닌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사나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중심부를 중앙으로 모으는 힘이 부족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로, 계속해서 꼬리뼈를 안으로 말고 등을 둥그렇게 부풀기 위해 노력했다. 내 자세에서 개선해야할 점과 필요한 부분을 새롭게 배웠다는 것은 기뻤지만, 사실 수련하면서 종종 억울한 기분이 솟구쳤다. 왜 선천적 체형의 차이 때문에 나는 이다지도 고생하는가. 가뜩이나 그 자체로 상당히 어렵고 유지하기가 힘든 동작들, 예를 들어 아르다 밧다 파드모타나아사나, 워리어 III, 시르사아사나, 바카아사나, 오래 유지하는 아도무카스바나아사나 등등 모든 자세에서 남들보다 추가적으로 꼬리뼈를 아래로 내리고 아랫배를 당기고 허벅지를 중앙으로 조이는 힘을 두배로 사용해야했다. 또한, 나는 만다고 말았는데, 더 말아야함을 알 때마다 더욱 부정적 감정도 솟구쳤다. 아, 힘들다. 이놈의 꼬리뼈, 고쳐지기는 할까.
어릴 때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유일하게 혼자 윗몸일으키기를 못하던 것. 내 다리를 잡아주던 짝꿍과 비밀스러운 눈빛 교환이 있어야만 몰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고 일어나던 것. 그리고 술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온 대학교 새내기 시절 방 안의 문턱에 엉덩방아를 크게 찧고 한동안 꼬리뼈가 아프던 것. 지하철 승강장에서 문득 바라본 스크린도어에서 골반이 앞으로 쏠리고 배가 아래로 쳐져있던 나의 실루엣. 달리기를 할 때마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아 신체가 덜렁거리던 느낌. 그리고 요가원에서 일년 가까이 수련을 했을 때조차도 갓 들어온 초보 회원들보다 윗몸 일으키기를 못하던 것.
처음에는 근육량이 너무 적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육량을 기르고 전방 경사를 해결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해도, 말아내고, 조이고, 모여도, 여전히 나는 부족했다. 애초에 내 등은 구부러짐의 범위가 좁았고, 내 요추는 판판했으며, 꼬리뼈는 지나치게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거는 내가 꼬리뼈가 갯수 하나가 남들보다 부족하거나, 날개뼈가 너무 작거나, 또는 흉추나 요추나 모양의 문제 탓도 있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근육량이 상당히 채워진 시점까지도 후면이 둥그렇게 말리는 모양을 애처롭게 해내고 있는 (그마저도 둥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내 모습이 설명이 되었다.
그리고 약간의 억울함.
저 사람은 원래 체형이 전굴하기에 적합한 몸이니까 노력 없이도 저 자세가 잘 나오는데, 나는 내가 못해서 못한 게 아니고 선천적 차이 때문인데, 라는 생각. 왠지 내 눈엔 그들이 나에 비해 그 동작을 잘 해낸다고 으스대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운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문득문득 치솟아오르는 울컥함을 막아내기도 힘들었다. 그들이 나한테 이렇게 해보라, 저렇게 해보라 라고 스스로의 경험에 기반하여 전굴자세를 설명하는 것도 싫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과 다양한 접근을 해보았는지 모르면서, 마치 내가 남들보다 힘쓰는 법을 몰라서 못하는 것처럼, 너무나 안일하게 내 자세에 대해 판단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체형에서 오는 힘듦, 그리고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자세에서 오는 무력함과 별 노력 없이도 잘 해내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열등감이 섞인 것이다. 이는 점점 내 마음을 옹졸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왜 그 자세가 안 되는지, 저들은 왜 쉽게 되는지에 대한 핑계를 찾고만 있었다. 남들과 비교에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 스스로의 결핍에 대한 합리화. 자꾸만 부끄러움이 늘어났다. 나도 잘못된 생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잘 안되는 자세 자체에서 오는 힘겨움보다 내면에서 싹 트는 부정적 감정이 더 커졌다. 이 때문에 또다시, 끝없는 자책의 반복. 아, 나는 그동안 요가를 이렇게 해왔는데 마음은 제자리구나. 여전히 질투심이 많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나를 갉아먹고 있구나. 옹졸해지고 작아졌다.
안되겠다. 내 안에서 남들을 해치지 말아야지. 나에게 집중하자. 해결방법은 내가 완벽하게 후면을 말아내는 것 밖에는 없겠다, 라는 결론이 났다. 나에게는 혹독하더라도. 그래서, 아무튼 계속 노력. 밧다코나아사나를 하면서 최대한 등을 둥그렇게 말아내는 연습을 했다. 다운독 스플릿에서 무릎을 가슴으로 당겨올 때 최대한 등을 천장으로 밀어내려고 애썼다. 소고양이 자세에서 고양이등을 할 때마다 더욱 아래복부를 당겨 등을 말아내었다. 자꾸만 자꾸만 둥글게 말고 말고 또 말았다. 모든 스탠딩 자세와 균형 자세에서 추가적으로 그 힘을 가져가려고 애썼다. 온 몸이 부들부들.
그렇게 모든 아사나에서 노력을 하되, 의식적으로 내 몸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다운독 스플릿을 하며 본 거울 속의 내 등은 확실히 전보다 말려있었다! 기뻤다. 노력에 대한 반응이 오는구나.
그리고 그 만족감과 사그라든 열등감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안 되는 동작에 대해서 타인과 비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은 단순히 노력해서 그 동작을 되게 하는 것으로 해결하면 안되는거야. 그렇게 해서 남들보다 더 잘해내면? 그럼 또다른 고난이도의 아나사에 좌절할 때마다 나는 불행해질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비교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요가에 대한 내 신념이 깨질까 두려워서였다. 요가에서는 특히, 타인보다 잘하던 못하던 그건 노력의 차이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했고, 노력을 더 많이 한 사람이 잘 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나에게 요가는 그 무엇보다 정직한 운동이었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대학교 때 나보다 학점도 안 좋고 대외활동도 안했고, 그저 항상 과방에서 술만 마시던 이들이 나보다 취업을 먼저 잘 (흔히 알려진 좋은 기업들) 하는 것을 봤을 때도 큰 억울한 느낌이 없었다. 원래 사회는 불평등하고 운이 많이 작용하는 곳이니까. 물론 그들이 그만큼의 노력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취업을 '잘' 한다의 기준도 모르겠고, 각자마다 삶이 다르기에 그리 와닿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요가는 달랐다. 내가 온전히 마음을 쏟는 대상이었고, 내가 노력할수록 성장하고 바뀌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내 원동력이었다. 요가는 들인 시간과 에너지만큼 대답이 오는구나. 그 정직함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등을 말아내는 것이 뭐라고, 대체 나를 이다지도 힘들게 하냐는 말이다. 괜한 불안감을 엉뚱한 사람들에게 풀어내고 있었다. 상대방의 동작을 속으로 평가하고 나와 비교하고 저들이 잘하는 건 원래 체형이 저래서 저런거야, 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내 노력에 대해 대답이 오는 것을 보고 그 이후부터 모든 부정적 감정들을 멈추게 되었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라, 라는 우리 스승님의 말씀처럼, 나는 너무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려 애썼고, 다만 그 미세한 차이점이 눈에 보이지 않아 좌절했던 것이다.
시간과 노력이 쌓이니 그 것이 보여 조금씩 평온함을 찾았다. 아직 갈 길은 여전히 멀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음에 또 감사함을 느꼈다. 요가는 내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면서 싸움이기도 하다. 타인이 잘하던 못하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다만 내 자신과의 끝없는 조율이 필요하다. 밀고 당기기. 휴식을 내어주고 몰아붙여보기도 하기. 그리고 조금씩 달라지고 성장하기. 욕심은 적당히만. 나를 사랑하면서. 안 되는 내 자신 또한 이해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