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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성 Apr 12. 2021

젖고 있다. 유실이, 저기서

젖고 있다. 유실이, 저기서.

 

노을에 젖어 체온이 높아진 소나기가 한창 내렸다. 유실은 따뜻하게 젖고 있었다. 누가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으로 유실은 셀리를 생각했다. 포옹을 생각했고, 따뜻함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런 사람은 이제 없다. 어느 시간의 풍경 속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멀어진 사람. 눈을 감으면 검은색 구름이 가득했다. 그 속에서도 소나기가 내릴 것이었다. 유실은 유실 속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리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셀리는 약국 직원이었다. 소나기가 내리던 날 이상하게 약국에서 우산을 팔고 있어 유실은 급하게 약국으로 들어갔다. 오래 내릴 것 같진 않았지만, 마침 집에 우산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우산을 구입했다. 긴 장우산이었다. 셀리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계산해주고 우산 비닐을 휴지통에 넣었다. 불친절하다기보단, 무심함을 느낀 유실은 살짝 기분이 상한 채 우산을 펼쳤다. 그런데 우산엔 큰 구멍이 나있었다. 

저기요.

네?

우산에 구멍이 나있어서요. 

셀리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미안한 듯 웃으며 어머, 죄송해요. 다른 걸로 바꿔가세요. 라고 높은 톤으로 말했다. 아까 전과는 다른 입꼬리였다. 저 입꼬리의 곡선을 유실은 바라보면서 똑같이 따라하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웃어버린 유실은 우산을 확인하는 셀리를 보면서 잠깐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여기 이 우산은 멀쩡하네요. 

씩씩하게 말하는 셀리를, 유실은 잠시 보다가 휘청일 것 같아 셀리의 손을 잡았다. 푹신했고 부드러웠다. 그때부터였다. 


만날 때마다, 셀리의 푹신한 가슴에 유실이, 유실의 푹신한 가슴에 셀리가 파고들면서 구름이 구름과 합쳐지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서로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따듯했고 늘 우느라 바쁜 셀리와 유실의 가슴은 젖어 있었다. 가끔 유실은 셀리에게 우비라도 입어야 하나 봐. 라고 농담했고, 울다 지친 셀리는 유실의 얼굴을 더듬었다. 구름을 조각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유실은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장마는 소나기를 이어 붙인 게 아닐까. 소나기가 그치지 않았다. 몸이 무거워지면 비로 비로 떨어지는 구름은 사라지고 있었다. 셀리는 자주 아팠고 약국에서 약을 훔쳤다. 약사는 셀리의 도벽을 알고 있었지만, 아픔 앞에서 착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약사는 모른 척해주었다. 셀리는 그런 약사에게 종종 도시락이나 간식을 선물했다. 약사는 모른 척 받아주었다. 유실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해서, 사실, 셀리가 떠나는 뒷모습도 모른 척했다. 멀어질수록 완전해지는 셀리. 그런 상상을 하면서 유실도 뒤돌아 갔다. 


이유는 없었다. 유실은 조금씩 생각했다. 원래 날씨란 게 그런 거지. 계절성 아픔도 있을까. 그때, 그냥 구멍 난 우산을 가져갔다면 좋았을까. 지금 이렇게 가슴에 구멍이 나 있는 거, 정말 소나기를 피할 수 없게 내 속에 숨겨놓은 내가 젖고 있어서. 유실은 유실을 그대로 두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엔 구름과 햇빛이 반반이었다. 무표정의 빛이 쏟아지면서 유실은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셀리의 첫 무표정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왜 그랬니.

왜 친절했니 모두에게


유실은 중얼거렸다. 중얼거릴수록 명확해지는 마음을 유실은 외면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내 속에 있는 걸. 그걸, 꺼내려면 구멍을 내야 하고 그러면 이 소나기를 그대로 맞아야 하고 나는 우산이 아닌데, 우산살이 벗겨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는데. 너는…


검은 구름으로 염색한 듯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약사는 조용히 셀리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아파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내가 양보해야겠다 생각했던, 약사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셀리가 활짝 웃는 사진, 그 눈동자를 마주칠 수 없는 유실, 약사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빛이 아프고 있는 것 같은데, 비가 아프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선 아무도 아픈 척을 하면 안 되었다. 


비가 유실의 얼굴을 조각하면서 유실은 웃었다. 천천히 소나기가 그치고 있었다. 잠시였을까. 이 마음은 잠시 동안의 마음일까. 유실은 몽글해진 가슴을 툭툭 쳐보았다. 행복했니. 유실은 물었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아서 유실은 혼자 대답해야 했다. 유실은 고개를 숙이고, 구멍난 장우산을 약사에게 씌워주었다. 아무도 비에 젖지 않았고, 그렇게 소나기가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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