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과 적당함 사이

2511 세 번째 열쇠 : 안갯속에서 춤추기

by 송무난

월말에 여행 계획이 있어 그전에 미리 할 일을 끝낸 뒤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전날 밤늦게까지 인쇄 발주를 하고, 밤 10시부터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해 다섯 시간 정도 눈 붙이고 새벽에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11월을 천천히 돌아본다.


올해가 가기 전에 스마트 스토어를 꼭 열고 싶어서 그 준비에 몰두한 한 달이었다. 엽서와 스티커는 주문 들어오면 바로 발송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뱃지와 키링은 1차 샘플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다시 고쳐보는 중이다. 이제 촬영도 하고 상세페이지도 만들어야 하는데... 생각하니 살짝 가슴이 조여 온다.


하지만 책상 앞에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던 시기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없다. 당장 보여줄 것을 준비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그 사이사이를 재봉틀 수업으로 채웠다. 입문반과 초급반을 지나 드디어 자유반 수업 시작! 연초에 당근으로 사놓고 자리만 차지하던 재봉틀을 이제야 뽕을 뽑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오랫동안 상상했던 작은 인형을, 선생님의 도움으로 완성해 자주 쓰는 가방에 달았다. 모아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You've come so far."


이상하게도, 이렇게 계속 수정하고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을 사람들 앞에 내놓으려고만 하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진다. 겨우 이런 걸 만들려고 독립한 거야? 대답도 여전히 부지런하게 한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면 그냥 회사에 있었으면 되는 거고, 이직을 해도 익숙해지는데 1년은 걸렸는데, 아직 좀 더 삽질해도 된다고 봐. 때리고 쓰다듬고 반복하며 모호한 시간을, 애매한 자신을 견디는 중이다.


모호함이 길어지면 지겹고 간지러워서 으악!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진다. 조금이라도 쉽게 견딜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가 떠올랐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는 괴롭기는 하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결국 그라데이션으로 이어져 있을 텐데, 왜 어떤 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서 혼란스럽고, 또 어떤 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딱 좋은지가 궁금해졌다. 어디까지가 적당함이고 어디까지가 모호함이지?


여행하는 내내 조용한 순간마다 고민했다. 더 헷갈리기만 해서 휴가 중이지만 직원(지피티)을 소환해서 물어봤다. 같은 애매한 중간값의 상황에도 끌려가면 모호함이고, 선택하면 적당함이란다. 결국은 주도권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도권은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우리 직원은 아래와 같이 답했다.


시선을 바꾸면 해석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면 주체의 위치가 달라진다.


꽤나 그럴듯한 힌트를 얻었다. 그럼 배웠으니 바로 문제에 적용해 보자.


[상황] 준비가 순조롭지 않으며, 하찮고 별것 아닌 것을 만들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속상함.


1. 시선 바꾸기 (결과 → 과정)

-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첫 번째 작업

-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계속 개선하고 있는 중


2. 해석 바꾸기 (부족함 → 기회)

- 작고 귀여운 것에 에너지를 온종일 쏟을 수 있다니, 너무 소중하잖아

- 그동안의 기준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과정

-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3. 태도 바꾸기 (조급함 → 몰입)

- 지금은 '결정권자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즐길 시간


모호함을 적당함으로 바꾸는 3단계. 앞으로 수많은 응용 문제가 튀어나오겠지만 당분간 이 단계를 반복 적용해 보기로 한다. 결과가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 시기 또한 내가 선택한 나의 것임을 12월에 또 잊고 괴로워하지 않도록 적어놓는다.


안개 속을 통과해 2025년을 지나온 우리들을 위한 엽서를 스마트 스토어에서 오픈하려고 한다. 저마다 무사히 건너온 시간들을 축하하며, 우리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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