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의 기도

2512 네 번째 열쇠 : 의심은 나의 힘

by 송무난

사실 이 모든 것은 한밤중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산타 할아버지, 조상님.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내가 나를 믿게 해 주세요."


시간 안에 안 될 것 같은데? 별로일 것 같은데? 이렇게 순순히 풀릴 것 같지 않은데? 미리 계획을 세우고, 돌다리를 두들기고, 꺼진 불을 다시 보아도 일어날 사고는 결국 일어나기 마련이다. 경험이 쌓이면 초연해지고 여유가 생길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를 좌우명 삼아, 검토의 굴레에 갇혀 집에 못 가는 프로 야근러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불신의 화살은 늘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못할 거야'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무한 반복 BGM으로 듣다 보면, 배터리 성능 나쁜 아이폰처럼 에너지가 줄줄 흐른다. 뿌엥하던 INFP가 그렇게 통제광 INFJ로 진화(또는 흑화)하는 동안 탑재한 핵심 기능은 '의심'이었다.


어김없이 번아웃을 향해 달리다가 막다른 길을 마주한 어느 밤의 기도였다. 잠을 못 자서 기운은 없었지만, 펑펑 울고 비워냈더니 아침 출근길에는 마음의 각도계가 다시 0점에 있는 듯했다. 무릎까지 꿇고 그렇게 빌었으니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보고 어떻게 쫌 해주시지 않았을까? 그날 하루는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해 보기로 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려나... 적어도 하루 종일 저주를 내리지는 않겠지. 저주보다는 아무래도 응원이 낫지 않을까? 무거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외쳤다. 오른발 딛고 잘한다! 왼발 딛고 잘한다! 짜란다 짜란다 짜란다~ 바보 같기는 했지만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도망치지 않고 무사히 회사 입구까지 온 나에게 뜨신 카모마일 차 한 잔을 사 주었다. 아, 살살 달래는 쪽이 효율이 더 좋구나. 그 짜란다 스텝을 시작으로 지금의 무나니스트까지 왔다.


신중한 고민을 통과해 선택한 수많은 기회를 돌아본다. 여기 더 있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하는 서늘한 예감이 번번이 나를 구해 조금씩 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앞에 놓인 것은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려는 돌멩이가 아니라, 최선이 될 때까지 날카롭게 갈아서 광을 내주는 부싯돌.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지금의 방향도 수많은 검증을 통과한 것이니 그 과정을 믿어 보기로 한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의심을 믿는 것.


큰돈 쓰지 않고, 소량 제작 가능한 것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돌다리를 두들기며 온라인 스토어를 오픈했다. 감사하게도 지인분들이 구매해 주셔서 택배 포장하며 즐거운 월초를 보냈다. 존경하는 디자이너님의 달력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일정이 조금 빡빡했지만, 오히려 시간 제한 덕분에 꼭 필요한 의심만 남기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인쇄 테스트 끝에 마음에 쏙 드는 색감의 결과물이 나왔다. 광활해 보이던 A3 포스터 한 장을 채우는 경험을 얻고 나니 또 다른 작업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거봐, 의심은 나의 힘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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