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게 아니라 민감한 것입니다!
소심하다고 오해받는 이들을 위한 자기설명서
중학교 때 부모님은 친구가 너무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 친구 아들딸 모임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끌려간 집단 여행에서 난 몰래 숙소 구석에 숨어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소설을 읽고 있었다.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낮 시간에 교우 관계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책 읽는 나를 부모님 친구 분이 보곤 “남자 새끼가 이런 데 와서까지 책을 보냐”며 억지로 책을 뺏은 후 무리로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얘가 내성적이라며 사람들과 함께 깔깔 웃으셨다. 그 후 몇 년이나 고민했다.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한 걸까?’ 나처럼 여기는 사람 꽤 될 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러분 소심한 게 아니다. 민감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다.
대학내일 이정섭 에디터 munchi@univ.me
알고 들어가야 할 전제가 2가지 있다. 첫 번째는 ‘민감성’이란 용 어다. 민감성은 자극에 예민하다는 의미다. 촘촘한 그물을 상상 해도 좋다. 촘촘한 그물 덕에 민감한 사람들은 같은 사건에도 받아들이는 정보가 많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다. 색도 더 미묘하 게 구분한다. 보디랭귀지도 빨리 파악하며, 인간관계는 복잡하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해당하는 사항이 많다. 민감한 이들은 처리해야 할 정보가 많기에 남들보다 에너지 가 빨리 닳는다.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집돌이 집순이라 고 욕먹는 이유가 이거다.
민감함 ≠ 내성적
민감한 사람은 내향적인 경향이 있지만, 둘이 똑같은 말은 아니 다. 정확히 설명하면, 민감한 사람이 지친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 고, 소심하다고 비웃음당해 ‘에잇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해’라고 마음먹은 결과 내향적으로 변한다. 내향적, 외향적인 건 현상이 지 원인이 아니다. 민감한 사람도 자신을 컨트롤할 여건이 되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두 번째, 민감한 성격은 타고난다는 사실이다. 발달심리학자인 하버드대 제롬 케이건 교수는 아기 500명을 무려 11년간 추적 연구했다. 케이건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어릴 때 자주 울고 깜 짝깜짝 놀래던 ‘고반응성 아기’들이 커서도 대부분 성격이 예민했다.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은 한술 더 떠 성인들에 이런저런 자극을 준 다음 그들 뇌를 fMRI로 촬영했다. 민감한 사람 뇌가 그렇지 않 은 사람들 것보다 자극에 격렬히 반응했다. 왁자지껄한 모임에서 기 빨리는 현상의 과학적 근거다. 민감성이 선천적이란 조사 는 얼마든지 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린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다. 이 민감한 특성을 기정사실로 치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향적인 척 대학생 10명 중 3명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요
대학생 중에도 민감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온라인 설문조사기 관 서베이몽키를 통해 대학생 300명에게 민감함에 대한 질문 들을 던졌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내성적이라 는 말을 들으며 지냈다는 답변자가 37.3%였다.
민감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과의 만남에 에너지를 과 하게 쓰는 경향. “개강 총회나 동아리 같은 낯선 모임에 나가 면 쉽게 피곤해지는가”는 질문에는 56.7%가 그렇다고 답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일부러 외향적인 것처럼 행동한다” 는 대학생은 31%나 됐다. 민감함을 측정하는 다른 질문들에도 30% 이상은 그렇다고 답 했다. 민감한 이들은 둔감한 이들처럼 여기저기 자기 고통을 떠벌리지 않기에 자기만 그런 줄 아는데, 주변에 꽤 많다.
민감한 존재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민감성이 선천적인 특성이고, 감추고 있을 뿐 생각보다 많다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민감한 건 저주받은 특성일까? 그렇지 않 다. 일레인 아론은 진화심리학의 관점으로, 사람이든 동물이든 공동체엔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문제를 파악해야 하는 개 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경고 방송을 먼저 울리 는 이들이다. ‘프로불편러’라 부를 수도 있다. “저분 말투가 이 상해요. 혼이 비정상이라니.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요.” “선배, 방금 하신 말씀은 여성 전반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며 남성에 종속적인 존재로 비하하신 느낌이에요.” 민감한 개인은 이런 민감함 탓에 괴롭겠지만 공동체 전반은 건강해진다.
불리한 것투성이 민감한 삶이지만, 좋은 점도 있다. 앞서 소개 한 일레인 아론의 fMRI 뇌 촬영 영상에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 았을 때, 민감한 뇌는 둔감한 뇌보다 훨씬 빛났다. 행복도를 1 에서 10까지 숫자로 메기면, 둔감한 사람이 기껏 4~7 정도를 왔다 갔다 할 사이 민감한 당신은 1~10까지 널뛰기한다는 이 야기다. 그러니 민감한 여러분께선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등 돌리지 말길. 에너지를 심하게 갉아먹는 이들을 빼놓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도 해보시라. 가끔 지칠 땐 다음 말만 남기고 휙 돌아 집으로 향하면 된다. “오늘은 내 민감한 정신이 휴식 을 취하는 날이야. 안녕.”
<참고>
책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 일레인 N. 아론
책 『센서티브』 일자 샌드
책 『운동화를 신은 뇌』
팟캐스트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편
PS 매거진 <대학내일> '이런 소심하게 태어나버렸잖아' 기획 기사에 실은 피처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