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은 후
친구 A : 너, 하루키 좋아해?
나 : 아니! 별로. 누가 줘서 그냥 보는 거야. 가볍네. 심심할 때 읽기 좋을듯.
1999년 여름 대화다.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들고 있다가, 친구에게 들켰고 구질구질한 변명을 하다가 책을 슬쩍 가방에 넣었다. 부끄러워하며.
90년 후반 하루키 소설은 일종의 '금서'였다. 책 속에 위험한 사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책이 아무 '사상'이 없다는, 그래서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 가벼운 사람 취급 받아서 금서였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 사람에 대한 당대 통념은 아래와 같다.
1) 감성 과잉 중2병 환자
2) 취향 없이 유행을 따르는 얼치기 힙스터
3) 위스키나, 재즈를 들먹이며 허세부리는 속물
하지만 감히 단언하건데, 당시 소설 좀 읽는다는 20대 대부분은 '몰래' 하루키를 읽었다. 묘하게 야한 <상실의 시대> 섹스 씬을 곱씹고, 현실의 '미도리'를 꿈꿔보지 않은 남학생이 얼마나 될까. 너도 읽고 나도 읽지만 모두 안 읽은 척 하는, 하루키는 그런 존재였다.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나왔다기에, '지나가다 우연히 눈에 띄어서 휴가 가서 심심할 때 읽을 겸' 구입했다. 절대 하루키 팬은 아니... 여하튼 하루키 신작이 나오면 미디어들은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스포츠 뉴스처럼 열심히 보도해대는데, 그따위 행태는 늘 내게 큰 흥겨움을 준다. 검색 결과 역시 베스트셀러의 하루키. 예약판매로만 30만부, 곧 50만부 찍을 예정이며, 연말이면 100만부는 거뜬하다고 한다.
YES24의 구매자 연령 통계에 따르면, 이 책의 최대 독자는 30대 남자다. 구매자의 1/5이 30대 남자다. 2위는 40대 여성, 3위는 40대 남성이다. 서점가 주요 독자는 일반적으로 20~30대 여성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기사단장 죽이기>는 다른 책들보다 독자 연령대가 10살 정도 높은 셈.
어림짐작하자면 아마도 과거 하루키 독자들이 꾸준히 하루키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 테다. 판매 부수 기사의 무미건조한 문장을 읽으며 난 의외의 감동을 느꼈다. "긴 세월이 흘렀고, 많은 게 바뀌었지만, 모두들 여전히 '하루키 이야기'를 붙들고 있구나." '하루키 이야기라니 무슨 말이야?'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 '나'는 30대 후반 초상화 화가다. 아내하고는 평탄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기 작품 그리길 꿈꿨지만 몇 년째 개점휴업 상태. 그림 기술은 있다. 하지만 기술만 있다고 창작을 할 순 없는 법. '나'에겐 '반짝이는 창작의 빛'이 결여됐다. 그림 기술만 활용해 사장님 초상화, 국회의원 초상화를 그리며 살던 어느 저녁 아내가 충격적인 통보를 전한다. "우리 이혼해. 나 다른 남자가 있어." 갑자기? 왜?
그러나 하루키 소설 남주인공답게 '나'는 아내의 이혼 요구를 담담히 받아들인다(하루키의 남주인공은 취향은 분명하지만 관계에선 수동적이다. 나를 바꾸진 않지만 상대의 의견에 반대하진 않는다).
그 길로 자동차로 일본 각지를 떠돌다가 친구의 제안으로 산속 대저택에 머물기로 한다. 친구의 아버지는 유명 화가였지만 이제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갔다. 빈집 관리도 할 겸 조용히 그림도 그릴 겸 머물기로 하지만, 소설이 그렇게 흘러갈 리가 없지. 대저택에선 기기묘묘한 일들이 벌어진다.
'자기 복제'. 하루키 작품에 대한 비판이다. 매번 비슷한 주인공에 문체도 비슷하니 근거 없는 비판은 아니다. 만약, 새로운 문법을 제시해야 '좋은 문학이다'라는 기준이 있다면 하루키 소설들이 높은 점수를 받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디 앨런의 신작 영화가 나올 때 우디 앨런 팬들이 기대하는 스타일이 있다. 긴장할 수록 말 많아지는 찌질한 주인공, 잇달아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여하튼 '하루키 이야기'의 시작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수동적인 삶을 사는 주인공이 나온다. 무식하거나 귀가 얇아 수동적인 건 아니다. 다만 자기 확신이 부족하다. 옳은 게 뭔지, 뭘 해야하는지 분명히 선택하지 못할 뿐.
2) 세월이 지날 수록 '가능성의 깔대기'가 좁아진다. 어릴 적엔 A, B, C 모든 선택이 가능했지만, 어느새 자기 앞엔 B의 길만 남아있다.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
3) 겉으론 큰 불만 없이 주인공은 B를 행하며 살아가지만 그 삶엔 무언가 핵심적인 게 빠져있다.
4) 미세한 공허감을 하루하루의 루틴으로 극복하던 어느날 비일상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숨겨진 저택 다락에서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이 붙은 노 화가의 숨은 걸작을 발견한다. 그림을 발견한 얼마 뒤부터 밤마다 집밖에서 방울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간 그곳엔 거대한 돌무더기가 있다. 방울소리는 그 돌무더기 아래에서 울리고 있던 것. 그리던 어느날엔 이데이가 현현(명백하게 나타남)한다.
<기사단장 죽이기> 1편 부제가 '현현하는 이데아'다. '제목 센스보소.' 중2병스럽다고 욕했더니 진짜 이데이가 나타났다. 키는 60cm,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노인 형상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속 캐릭터와 똑 닮았다. "안녕? 난 이데아야. 난 모든 걸 알고 있지."
스포일은 그만 하기로 하자. 이데아를 만난 후 '나'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갖가지 일을 겪는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을 맞딱뜨린다. 피한다면 피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은 자신에게 큰 고통을 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생각해 낸 옳은 행위다. 아니, 세상에 옳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의지로 찾아낸 최선이다.
선택에 따른 결과를 겪은 후 '나'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다. (요기 부분은 진짜 스포일이라 패스)
"하루키 초창기 소설을 좀 읽어봤다. 이제는 읽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의 전형이지. 평범에 미달하는 남자가 미녀에게 둘러싸여 늘 사랑을 받더군."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비판이다. 겐지는 하루키 소설이 '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개인적 감상을 끼적이는 일본 사소설의 전형이라고.
그래, 하루키 이야기들인 모두 '나'가 중심이다. 그런데 과연 그 나의 이야기가 문제인가. '나'들의 지극히 개인적 스토리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하루키의 나는 우리 보편 정서에 다가온다. 서사는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그 비현실을 맞아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무척 현실적이고, 하루키는 우리 머릿속에 분명히 있지만 제대로 설명치 못하는 감정을 이야기로 그려낸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천재적으로. 단편 <하나레이 만>에서 아들을 상어에게 잃은 엄마가 세상과 살아나가야 하는 애매함을 그려냈고, <상실의 시대>에선 의미 잃고 세상을 겉도는 청년의 슬픔과 희망을 긴 이야기로 풀어냈다.
소설이란 장르가 재미 말고 다른 가치가 있다면, 이것이다. 설명문 한두 줄로 전할 수 없는 진실, 김연수 작가가 '소설적 진실'이라 부르는 그것.
하루키 소설에 평행우주(1Q84) 말하는 이데아(기사단장 죽이기)와 이름을 훔쳐가는 원숭이(시나가와 원숭이)가 나옴에도 우리는 그 이야기에 묘한 공감을 느끼는 건, 다시 말해 "이건 묘하게 내 이야기다"라고 느끼는 건 이런 덕이다.
"우리 인생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는 말이죠. 그 경계선은 꼭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멋대로 이동하는 국경선처럼요."
-<기사단장 죽이기> 중-
겐지가 비난했듯 하루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평범에 미달할지 모른다. 의지도 약하고, 확신도 부족하고, 공상에 빠져 살고. 그런데. 정확히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약간은 내향적인 공상하는 보통 사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우린 여전하고, 낯선 삶을 여전히 헤메기에 우린 하루키의 이야기에 반한다.
한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던 독자가,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게 확 낯설어진 어느 날,
알라딘 앱으로 <기사단장 죽이기>를 결재하기도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