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간 개복치 Sep 20. 2017

슬픈 기억도 지워지는 건 원치 않아

나쁜 감정은 모두 지워버리는 초능력자가 제안해온다면

전 세계 사람들 2%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면?

미국, 일본, 한국. 장소든 나이 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듯. 휙


HBO의 <래프트오버>는 세계적인 인간 증발 사건이 벌어진 이후 남은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를 다루는 미스터리 드라마입니다. 


사건 자체는 신비롭지만, 그 비밀을 밝혀가는 게 포인트는 아닙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꽤나 지적인 드라마죠.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우선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는 사람이 있겠죠. 대체 왜 사라졌지? 어떤 기준으로 사라진 거야? 온갖 자료를 모으고 난리가 나겠죠. 


또 사라진 가족을 찾고자 헤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초자연적인 일이다 보니 어떤 이들은 현실 시스템에 의미를 읽고 자기 맘대로 쾌락만 좇을 테고요.


반대로  이 사건을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으로 보고, 종교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드라마 속엔 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우리는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레프트오버의 1시즌밖에 보지 못했는데요. 1시즌의 에피소드들은 남은 사람들이 각자가 남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옴니버스 방식으로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좋은 드라마이니 기회가 되면 보세요.


많은 에피소드 중 제 마음을 휘어잡은 건, 사진 속 장면입니다. 


왼쪽 흑인 남성은 마치 신흥 종교 교주 같은 사람인데요. 손만 대면 사람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합니다. 


흔한 신흥 종교들과는 달리, 이 교단은 효율적인 기업 시스템을 자랑합니다. 신자든 비신자든 상관없이 '고객'에게 정확한 금액을 받고, 깔끔히 슬픔을 지워주죠. 


오른편 눈물을 흘리는 여성은 여주인공입니다. 2%가 사라진 그 날, 남편과 자식 모두를 잃었습니다. 식탁에서 함께 아침을 먹다가 눈 돌린 사이 모두가 사라졌습니다. 방금 전까지 농담을 던진 남편은 영원히 사라졌죠.  


여성은 처음엔 완벽하게 무너집니다. 소중한 모든 게 사라졌으니까요. 그러다가 소위 '산사람은 살아야지' '좋은 데 갔을 거야'라는 등의 주변 위로를 받고 다시 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하죠.


여성에게 온전히 할애된 에피소드 한 편은, 주인공이 웃고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하루를 지루할 정도로 세세하게 보여줍니다.


"잘 살아가는구나" 

처음에 했던 안심은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묘한 불편함으로 바뀝니다. 카메라 담은 여성의 표정과 행동이 어딘가 어색하기 때문이죠. 집에 돌아와 어둠 속에서, 가족이 사리진 그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여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위로와 도움이 아무리 많아도, 어떤 슬픔은 잊히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걸 우리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사진 속 장면처럼, 여주인공은 슬픔을 제거해준다는 초능력자를 찾아오게 되지요. 돈을 지불하고, 남자 앞으로 간 후 모든 슬픔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순간. 여성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립니다. 


여자는 울면서 말합니다. 


슬픔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혹시, 내가 가족과 보낸 그 시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게 된다는 말인가요? 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안 슬플 수 있죠? 혹시 가족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건가요?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비슷합니다.



여자의 삶을 온통 파괴한 슬픔의 근원이, 잃어버릴까 두려운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는 사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나 역시 정확히 이해 간다는 사실. 인간이 가진 특수한 조건들이 슬펐고 아름다웠습니다. 


한창 괴로운 시절엔 "제발 이 기억만 사라지면~" 바랄지 모르지만 정작 기억과 감정을 누가 지워주겠다고 한다면 저 역시 쉽게 응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상상하자면 기억을 20%만 지울 순 없을까. 그 20%는 인간이 가진 위대한 능력, '과거를 제멋대로 행복하게 추억하기' 스킬로 채울 테니까. 잡생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덧붙이면 오늘은 전 특별히 슬픈 일이 없었고요. 그냥 일을 하고 있었으며, 아주 옛날 일이 문뜩 떠올라 글로 옮깁니다. 


#주간개복치 #에세이 #슬픔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적 조현병과 그 밖의 이야기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