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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간 개복치 Feb 18. 2018

출판 계약 후 한 달째 글 못 쓰는 사연

어쩌다 닌겐으로 태어난 불운한 이들에게 바칩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OO 출판사 OOO 에디터입니다. 혹시 저희 출판사와 책을 내실 의향이 있으신지 문의드립니다."


올해 초 어느 날, 출간 제안 메일이 왔다. 블로그 매입 메일의 다른 버전인가? 마저 읽어봤더니 대박, 출판사에서 보낸 진짜 제안이었다. 출판사 에디터님께서 어쩌저찌 내 블로그를 들어왔고, 온갖 일상을 끼적여둔 내 글을 보았으며, 좋아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라 오판한 것. “소심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마음을 글로 쓰면 어떨까 싶어요.  작은 일에 예민하고, 머뭇거리고, 늘 당하고 사는 사람들요.”


유명세도 전문성도 없는, 평범한 사람의 에세이를 따위를 누가 읽겠냐 싶었지만 출판이라는 행위 자체가 멋진 일로 느껴져 제안을 넙죽 물었다. 난 정말로 소심하고, 예민하고, 머뭇거리는 사람 아니던가. 정확하군.


한 차례의 미팅 후, 허접하기 이루 말한 데 없는 기획서를 보냈고, 계약을 맺기로 했다. 돈과 관련된 조건은 내 기준엔 충분히 괜찮았다. 부르마블 돈도 아닌 진짜 돈을 주신다니 감지덕지다. 걱정스러운 건 내 예상보다 짧은 마감 기간이었다. 5개월 만에 책 한 권 들어갈 에세이를 몽땅 써야 한다. 일주일에 2편 이상 꼴이다. ‘대충 뚝딱 써내면 되겠지, 그리고 마감 약간 늦는 게 큰 문제는 아니잖아’라고 생각했지만...


계약서 곳곳에 섬뜩한 조항이 적혀 있었다. 고의로 마감을 어겨 피해를 준다면 넌 지옥의 불벼락을 받으실 것입니다. 엉망진창 원고를 넘기신다면 우리는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진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내 담당 출판사 에디터 분은 인상이 맑은 중키의 여성으로, 말투는 젠틀하지만 어딘가 단호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에서 악당 두목을 보필하는 실세 비서 같다고 할까. 악당 두목이 “뭐! 작가 놈이 엉망진창 원고를 보냈다고? 으아아” 분통 터뜨리면, 조곤조곤한 말투로 부하들에게 “회장님이 매우 화가 나셨어요. 작가님을 손봐주세요. 손가락은 부러뜨리시면 안 되고요. 그럼 수고해주세요.” 이런 느낌.


책을 천천히 내면 어떠냐는 말에 “저희 출판사는 올해 책을 내고자 해요.(단호)” 못 쓴 글을 보내면 큰일 나겠다는 반 진심 농담엔 “안 그러실 거잖아요.(단호2)” 어찌 보면 나에겐 행운이다. 똑똑 단호한 에디터님이 아니었다면 차일피일 글쓰기를 미루며 시간만 죽이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사실...오늘까지, 계약한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 한 자도 쓰지 않았다. 설레발 대마왕답게 “아싸! 나도 책을 쓰게 되었다” 동네방네 자랑을 한 후, 주말에 글 쓸 만한 조용하고 느낌 있는 연희동 카페를 서칭했고. 글 쓰는 기분을 만끽하고자 타자기를 닮은 무선 기계식 키보드도 샀지만. 정작 글은 쓰지 않았다. 지난 주말엔 카페에서 뭔가를 끼적이긴 했는데 그걸 글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두서없는 글자 덩어리에 가까웠지.


이런 키보드를 구매했습죠


글 안 쓰던 핑계를 대자면, 뭘 쓸지 도무지 못 떠올렸던 탓이다. 출판사는 그냥 나다운 에세이를 써주길 바랐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본 내 글엔 아마도, 나의 소심함, 예민함, 찌질함 등이 묻어있었을 테고, 세상 어디엔 나만큼 찌질한 이들도 존재하니까 그들의 공감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걷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면 발걸음이 꼬인다라고 했던가. 평소에 막 써대던 글에서 독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부분을 떠올렸더 도통 써지지 않았다. “에잇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지.” “흠...너무 교훈적이잖아.”


몇 개 사서 읽어본 에세이들은 남다른 경험과 긍정적 지혜가 가득했다. 나조차 의지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뿐이고, 나는 뭘 쓰나. 기자 생활을 몇 년 하다가 그만 두고 마케팅 일을 하며 살아가는 수더분한 내 인생에 대단한 경험이나 중요한 깨달음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혼돈의 시기엔 늘 그래왔듯 나는 모든 고민을 멈추고 리프레시란 핑계로 컴퓨터 게임에 매진했다. 당면한 현실 따윈 잊고, 가상공간 속 천하 통일에 골몰하다가 결국, 라스트 오브 최후, 피할 수 없는 마감을 앞두고 결심했... 아니 결심되어져 버렸던 것이다.  


에세이는 근본적으로 아무 글이다. 대단한 메시지는 필요 없다. 이룬 것도 없고, 한 사람 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도 겨우겨우 해내는 내 일상도 누군가에게 읽을거리가 될지 모른다. 적어도 이따위로 살면 안 되겠구나. 타산지석은 되겠지. 솔직히 막 쓰자. 꾸미지 않고. 읽는 이를 위해 약간의 재미만 양념 삼아 넣어서.


그래서 이제부터 쓸 글들은, 한국 사회에 태어난 미약한 인간이 코리안 스탠더드에 어떻게든 가까워지려고 아등바등하며, 때론 포기하고, 때론 정신승리하는 이야기다. 주제랄 것은 없으니, 만약 어떤 메시지나 통찰을 얻어 따라한다면 그건 절대 글쓴이의 책임이 아니다. 혹여나 이 블로그(혹은 책) 글을 읽을 땐 철저히 방관자의 심정으로 읽어주시길. <동물의 왕국> 다큐 남자 성우 목소리를 상상하며. “게으른 중년 인간이 할 일을 미루다가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습성이 소심해 쭈뼛대고만 있군요. 건기가 오면 말라죽겠지만 남자 닌겐은 그 사실을 모르죠.”     


P.S.

중학생 시절 매일매일이 괴로웠다. 공부도 싸움도 못 하는 삐쩍 마른 남자 중학생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이니까.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학교 가는 내게 어머니 왈. “넌 자세가 왜 그러냐. 남자가 당당히 어깨를 펴.” “...제가 뭐가 잘 낫다고요(우울우울).” 그 후 20년, 대입도 취업도 실패하고 히키코모리로 연명할 거라 스스로 비하하던 찌질한 남학생도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다. 생각보단 ‘평범’하게.      


P.S. 2

커다란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별에서 어쩌다 닌겐으로 태어난 불운한 이들에게 (이제부터 쓸) 글들을 바칩니다. 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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