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 눈물의 시절
첫째는 다행히 호흡이나 수유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 겉으로는 아주 건강해 보이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뇌 MRI 검사를 해야 해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며칠 더 머물러야 했다. 둘째는 태변 흡인 문제도 있었지만 아직 자발 호흡이 힘들고 몸무게도 너무 적게 나가는 상태라 당연히 퇴원할 수 없었다. 조리원을 가는 이유는 전문가들이 아이를 봐주는 동안 산모가 쉴 수 있기 때문이라던데, 나는 애들도 없는데 집에서 쉬어도 되지 않나 싶었다. 건강하지도 않은 애들을 낳은 내가 조리원에 갈 자격이 있나, 비참하지만 그런 생각도 했다.
조리원에 자꾸만 변경사항을 알려야 하는 처지도 눈물 나게 싫었다. 임신 때는 셋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가, 하나가 잘못되어 둘만 데리고 가겠다고 바꿨다가, 또 하나의 상황이 좋지 못해 우선은 하나만 데리고 간다고 했다가, 그 하나마저 못 데려간다고 또 연락을 해야 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이렇게까지 없을 수 있나 싶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한결같이 다정하게 염려하고 환대해 주시는 조리원 원장님의 친절 덕분에 잠시라도 전문가에게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결국 나 혼자 조리원에 가기로 결정하게 됐다.
조리원은 병원과 집 중간쯤에 있는 가성비 좋은 곳이었다. 호텔처럼 시설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갈하고 아늑했고, 모두가 친절했다. 그곳에서 내 몸은 의외로 빠르게 회복했고 마음도, 몸보단 더뎠지만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병원에서는 밥맛이 전혀 없어서 이렇게 조금만 먹어도 살 수 있나 싶을 정도였는데, 젖이 돌고 유축을 시작하자 돌아서면 배가 고파졌다. 밥을 욱여넣다 보니 밥맛이 꽤 좋았다. 남편이 사다 놓은 과자들도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조리원 앞에 있는 타코야키 집에서 야식을 사다 먹기도 했다. 우리는 간식을 먹으면서 그동안 못 본 예능도 보고 드라마도 봤다. 예능을 보며 재밌는 장면에 웃기도 하고, 드라마 내용의 반전에 '헉 대박...' 하며 서로 쳐다보기도 했다. 나는 잠을 좀 설치고, 중간중간 어떤 이유로, 또는 이유 없이 울음이 터지곤 했던 것만 빼면 아주 평범하게 잘 지냈다.
조리원에 입소하고 나서 처음으로 유축한 모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보러 갔던 날, 첫째의 mri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뇌량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초반에만 조금 형성되어 있고 뒷부분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뇌 주름이 부족하다고 했다. 거기다가 복부 초음파 결과 신장이 한 개고 그마저도 크기가 작단다. 이게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충격받을 일이 더 남았다니. 순간 휘청 하며 몸이 주저앉았다. 무릎을 붙잡고 겨우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발달장애는 피할 수 없는 일이란다. 경련 가능성을 더 염두에 두어야 한단다. 마치 운명이 내게 남은 모든 희망을 다 가져가겠다고 악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원망이 들면서 나는 다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도대체가 희망적인 얘기는 없는 건가요?"
담당 교수님에게 다소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녀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을뿐더러 꽤나 힘든 순간일 텐데... 하지만 의사의 상황까지 배려할 수가 도무지 없는 마음상태였다.
교수님은 잠시 정적과 함께 숨을 몇 번 고르고는 어렵게 말을 떼셨다.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 않냐고. 분명 많은 것을 해나가며 성장할 수 있으니 엄마 아빠가 단단해져야 한단다.
그녀의 진심 어린 태도에 마음이 금세 말랑해져서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애원하듯이 물었다.
"말도 할까요?"
"그럼요"
그 말을 하는 교수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그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 사실은, 첫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래도 그때의 그녀에게 희망이었을지 나름의 확신이었을지, 아니면 확신과도 같은 희망이었을지 모르는 말이, 의사로서는 얼마나 더 어려운 것인지 짐작할 수 있기에, 지금까지도 애틋하고 고맙게 기억한다.
MRI 촬영 때문에 먹은 수면 유도제를 작은 아기가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첫째는 며칠 동안 잠에 취해 있었다. 수유가 잘 되지 않아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며칠 더 머물러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며칠 더 면회만 다니며 조리원에 아기 없이 머물렀다. 아침저녁에 있는 모자동실 시간마다 마음이 괜히 더 서러웠다.
사흘정도 지나 아이가 깨어나고 다시 수유량을 회복했을 때에도 담당 교수님은 하루 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케어받기를 권했지만 나는 오늘 꼭 데려가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 당시에는 괜히 병원이 아이들을 아프게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미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고 병원은 그 진단만 내릴 뿐인데 마치 병원이, 의사가 우리 아이들을 향해 병을 하나씩 정해주는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지만 왠지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더 이상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왠지 교수님도 내 맘을 이해한 듯 퇴원을 허락해 주었다. 간호사실에서 오전 면회 시간이 끝나고 오후에 아기를 데려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겠다고 해서 남편과 나가 점심을 먹고 들어와 아이를 받기로 했다. 이제 아이를 데려갈 수 있다. 어떻게 되든 우리가 꼭 끼고 있어야지.
그런데 그래 놓고는, 점심을 먹으면서 갑자기 우리는 점차 말이 없어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기를 데려가고 싶었던 건 맞는데 우리가 사실 아기를 데려갈 준비가 됐던가? 아기를 어떻게 안는 거지? 차 안에서 아기가 울면 어떡하지? 혹시 토라도 하면 어떻게 치우지? 응가를 하면? 아 그냥 내일 데려가라고 할 때 그런다고 할걸... 생각해 보니 노답 철부지 엄마였다.
그렇게 우겨놓고 말을 번복할 순 없었고, 시간이 되자 속싸개에 잘 싸인 아기가 우리가 준비한 바구니 카시트에 넣어진 채로 신생아 중환자실 바깥으로 나왔다. 남편은 카시트가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몸에서 멀찌감치 팔을 떨어뜨려 카시트를 들고, 그대로 몸의 반을 고정시킨 채 다리만 움직여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을 나와, 자동차까지 갔다. 마치 로봇 같아서 웃겼지만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 20분 정도 차가 달리는 동안 남편은 갈고닦아온 운전실력으로 그 어느 때보다 책임을 다해 인생 안전운전을 했고, 다행히 아기는 한 번 정도 으엥 하고는 잠든 채로 조리원에 도착했다. 또 로봇 팔이 된 남편이 카시트를 조심히 운반해서 들어가자, 조리원 관리사님들이 신속하고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 가셨다. 휴. 조리원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첫째가 퇴원한 날은 내 산부인과 마지막 진료날이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정성스런 편지와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교수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거였는데, 그럴 겨를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의사라면 퍽 곤란할 것 같았다. 애써서 진료를 봐주고 출산을 도왔는데 아픈 아이들이라니, 출산 전에 하나도 진단하지 못했던 걸로 산모가 따지고 들면 어쩌지, 뭐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경력이 대단한 분이라 이런 일에 끄떡하지 않으려나. 그래도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지 않을까.
이 아이들을 무사히(?) 낳게 해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때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누구의 악의도 없었고, 아니 오히려 선의만이 있었는데도 일은 벌어졌다. 자꾸만 올라오려는 원망을 누르는 것이 나의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내 담당 교수님은 전국에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여서, 진료를 보려면 예약을 해도 세네 시간 기다리기 일쑤였다. 마지막도 역시 평소처럼 오랜 시간을 기다려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다 보니 대기석에 있는 많은 산모들에게 한 번씩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다들 건강한 아이들을 낳겠지, 왜 나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진료실에 들어가서는 실밥을 뽑았고, 교수님은 상처가 잘 아물고 있다고 말하며 소독을 해 주셨다. 약간 뜸을 들이다가 아직 태아에 대해 의학이 알지 못하는 지점이 너무나 많다는 얘길 하셨다. 그러면서 뇌는 알 수가 없으니 아이는 잘 자랄 확률도 있다고 하셨다. 이어서 다운증후군은, 부모가 잘해주면 정말로 잘 자랄 거라고 하셨다. 더 할 말을 찾는듯한 할아버지 교수님의 눈동자를 보다가 내 맘이 더 안타까워져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치만 여기서는 정말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눈물을 참고서, 대신 갑자기, 아직 스스로에게도 확신해 본 적 없는 말을 뱉었다.
"저희 잘 키울 거예요"
내 말에 내가 놀라 '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지' 생각하는 동안 교수님은 진짜 내 할아버지가 지을 법한 표정을 하곤
"당연하지!"
하셨다.
우리 첫째인 재재는 2.13킬로로 태어났지만, 태어나 며칠 동안 부기가 조금 빠지는 바람에 조리원에 도착했을 때는 1.96킬로였다. 조리원에서 가장 작은 아기였다. 재재를 보다가 신생아실의 다른 아기들을 보면 곧 속싸개를 스스로 풀고 엄마~ 하며 뛰쳐나올 것만 같이 어엿해 보였다. 재재는 신생아실 관리사님들에게 꼬맹이로 통했다고 했다. 원장님이 매번 꼬맹이 잘 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단다. 아직 너무 작아서 그런지 체온조절이 다른 아기들보다 더 미숙해서 가장 안쪽 따뜻한 자리로 옮겨졌다.
재재를 데려오고 나서 간단히 신체검사를 한 결과지를 들고 부원장님이 방으로 들어오셨다. 잠복고환이 있는 것을 알고 있냔다. 하, 그런 것도 있구나. 몰랐다고 하고 병원에서 들은 특이사항을 전달해 드렸다. 뇌량무형성증, 경련 가능성, ... 곧 조리원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부원장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마도 처음 들었을 질환명을 몇 차례 확인하며 종이에 꾹꾹 눌러쓰고는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 나가셨다. 그 토닥임으로 인해 쫓겨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재는 그렇게 걱정했던 것보다 매우 잘 지냈다. 밥은 먹을 수 있는 최대량을 먹었고, 배가 고프면 신생아실 어떤 아기보다 가장 우렁차게 울었다. 부원장님은 나나 남편을 볼 때마다 꼬맹이가 너무 야무지다고 기쁜 얼굴로 칭찬을 하셨다. 모자동실을 할 때면 남편과 함께 재재를 쳐다보면서, 얘가 진짜 아픈 애가 맞을까 하며 희망 어린 얘기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엔 시험 삼아 젖을 한 번 물려보았다. 관리사님의 도움을 받아도 나는 엉거주춤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내 젖꼭지는 재재의 입에 비해 택도 없이 커 보였다. 별 기대 없이 인형 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가슴을 열어 아이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런데 잠에서 막 깨서 눈도 채 안 뜬 재재가 그 순간, 입을 벌려 무언가를 찾는 듯 빠르게 고개를 이리저리 휘젓더니 금세 와앙 하고 내 젖꼭지를 물었다. 곧이어 강하게 빠는 힘이 느껴졌다. 아직 나는 이 아이가 나에게 무얼 가져다줄지 무서웠다. 이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을 후회하는 마음도 다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순간은, 내가 죽는 순간 떠올릴 몇 장면이 있다면 그중 첫 번째로 기록될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마음일까 스스로에게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상기되어 눈물이 고인 채로 남편을 쳐다봤다. 남편도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은 아이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이 아니었다 싶다.
재재는 너무 작고 약해서 아직 제대로 젖을 빨 힘은 없었지만 그 후로도 내 품에 안기면 자주 내 가슴 쪽으로 얼굴을 부비며 입을 벌려 댔다. 나는 아직도 이 꼬맹이가 소중하기보단 무서웠지만, 어느새 밤이고 낮이고 얘를 위해서 유축을 하면서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대학교 친구들 톡방이 있다. 거의 하루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여덟 명 중 내가 일곱 번째 출산이다. 앞의 여섯 명은 모두 건강한 아이들을 낳았다.(뭐 사실 아픈 아이를 낳은 게 내 일가친척을 포함한 지인들 중에 내가 처음인 것 같다.) 도저히 매일같이 이어지는 대화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응답으로 있으면 모두가 나를 걱정할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서 애들 소식을 들은 다음날, 소식을 간단히만 알리고 그 톡방을 나왔다. 동생에게는 퇴원날 소식을 알렸고, 엄마에게는 말을 못 했다. 친구들과 동료들 중 긴밀하게 자주 연락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히 소식을 알리고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덧붙였다. 모두들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어렵사리 꺼낸듯한 응원의 말이나 함께 속상해하는 말이 돌아왔다.
이제 한동안 고립된 생활이 이어지겠지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나 친구들을 다 잃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그때는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내 거만한 생각을 비웃듯, 조리원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한 친구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어떤 상황이든 응원하고 함께 하겠다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자꾸만 번져서, 끝까지 읽기 위해 한참 동안이나 메시지를 들여다봐야 했다. 어떤 친구는 전화를 걸어놓고는 말도 못 하고 울음소리만 들려주었다(물론 나도 메아리처럼 비슷한 울음소리만 낼 수 있었다). 또 다른 친구는 자기가 뭐든 하겠다며 같이 키우자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자기 자식을 잘 키워 우리 애들의 사회적 자본이 되어주겠다 했다. 또 다른 어떤 친구는 내 소식을 듣고 나서 이상하게 내가 애들을 잘 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종교도 없는 친구가, 뭘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냥 기도하겠다고 했다. 부부끼리 자주 만나던 친구는, 그 남편이 소원했던 종교에 다시 나가 빌어보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그 무엇도 힘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자신하면서 연락을 끊으려 했던 건데, 의외로 이 모든 말들이 너무나 힘이 되었다. 나는 이들 덕분에 조리원 생활동안 슬픔만큼이나 감동 때문에 많이 울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 잘 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희망이 하루하루 다시 생겨났다.
그리고 나의 가족들. 남편은 할 일을 제쳐두고 내 옆을 지켰다. 내가 아이들의 질환에 대해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으면 그만하라는 말대신 충전기를 꽂아 주었다. 너무 울고 있을 땐 울지 말라고 하지 않고 휴지와 찬 물을 가져다주었다. 찬 물을 마시는 순간에는 복잡한 마음이 신기하게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자신이 중심을 잡을 테니 나는 충분히 힘들어하더라도 건강만 잘 지켜달라는 부탁을 했다. 정말이지 완벽한 남편이었다. 출산 후 호르몬 파티가 펼쳐져 작은 일에도 예민해지고 화가 나기 일쑤라던데, 그리고 그 화는 주로 남편을 향하게 되어 있다던데, 이렇다 보니 나의 호르몬 파티는 남편에 대한 어마무시한 사랑으로 발현되었다. 연애와 결혼시절을 모두 합쳐도 이때만큼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ㅋㅋ 남편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졸면서 새벽 유축을 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서 잠을 자도, 나는 입맛이 없는 날에 남편 혼자 밥을 잘 먹어도 그저 고마워했다. 이렇게 사이가 좋은 시절이 없었다.
남동생은 매일 저녁쯤 오늘은 무슨 생각 중이냐고 연락을 해왔다. 맘이 지옥일 때 그 연락을 보면 순간 정신이 차려지고 가족들에게 아기들에게 미안해지곤 했다. 일부러 웃긴 얘기를 하거나, 그 당시 유행하던 예능 얘기를 했다. 동생은 내 얘기에 실없는 농담을 곁들여 맞받아주었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진짜로 맘이 괜찮아지는 순간이 생겼다. 엄마에게 애들 얘기를 전해준 것도 동생이었다. 엄마는, 그 속이 어땠을지는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무척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동생이 전해주었다.
엄마가 소식을 알게 된 후 다다음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하고 망설이며 쳐다만 보고 있던 휴대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통했다. 엄마의 전화였다.
같이 잘 키워보자고 했다. 아이들이 잘 키워줄 것 같아서 우리에게 온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하자 "그래. 울 수도 있지.."라고 하는 말 끝에는 떨림이 느껴졌지만 끝내 당신은 울지 않았다. 너스레를 떠느라 나중에 애들 크면 카페 차려서 커피 내리게 하고 같이 살 거라고 계획 다 세워놨다고 하자, 애들이 커서 너희랑 살고 싶어 할 거란 확신은 갖지 말라고 일침을 놨다. 나는 언제가 되더라도 결코 우리 엄마의 반만큼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조리원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사실 애들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이었다. 인생 최대의 변비가 찾아왔다. 출산 직후에 변비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듣긴 했다. 나는 출산 전후에 특히 너무 뭘 먹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리 변비약을 먹어도 신호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괜찮았는데, 하루하루가 지나자 점점 아랫배가 묵직하더니 심하게 아파왔다. 그 뒤로는... 말로 표현할 수는 있겠으나 굳이 하지 않는 게 좋을 여러 고통이 뒤따랐다. 고통이 극한에 이른 어느 날 아랫배를 붙잡고 화장실에 앉아 신음하는데 애들 아픈 걸 고민하고 속상해할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느껴졌다. 웃음이 났다. 그래 어찌 됐든 내가 괜찮고 건강해야 애들도 돌보고 애들 일로 속상해하기도 잘 해낼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 동안의 말 못 할 고생은 남편이 근처 마트에서 구해 온 푸룬주스 덕분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소 지저분하긴 해도 이 일은 확실히 내 맘이 한결 강해지게 하는데 일조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재재가 조리원에 오고 나서는 모자동실 시간에 내가 재재와 있어야 해서 둘째 나나 면회를 남편이 혼자서 다녔다. 어느 날 나나 면회를 갔던 남편이 돌아와서 조리원에 딸린 작은 정원에 산책을 가자고 했다. 말이 정원이지 옥탑방 앞마당 같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유일하게 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이었고 원장님이 가꾸어 놓은 몇 개의 꽃들도 보기 좋았다. 의자에 앉아 쉬는데 남편이 손을 잡더니 염색체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이미 체념했는데도 순간 심장이 뛰었다. 재재는 염색체 검사 결과 이상이 없고 나나는 21번이 세 개, 다운증후군이 맞다고 했다. 나나의 결과에는 속상했지만 재재의 염색체에 이상이 없다는 것에 너무 놀라고 감격해서 남편과 또 한 차례 n번째 눈물을 흘렸다. 재재가 잘 자라면 나중에 나나를 혼자 돌보기 힘드니 셋째를 가져야 하나 하는 농담을 했다.
나중에 보니 재재는 염색체에 이상이 없더라도 여러 군데의 기형으로 보아 유전자 이상이 분명히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색체에 이상이 없다는 것은 더 복잡하고 비싼 유전자 검사를 해 봐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아직 지식이 부족했던 우리는 그 순간엔 재재가 잘 클 것으로 생각했던 거다. 재재의 외래를 다니며 이것을 깨닫고, 그날 작은 정원에서의 호들갑을 씁쓸하게 기억하게 됐지만, 그때에는 그렇다고 다시 처음처럼 절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나는 결국 조리원 마지막 날까지도 퇴원하지 못했다. 덕분에 조리원에서는 나나가 다운증후군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신생아실 관리사님들은 쌍둥이들이 이렇게 작게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나나를 보지 못해 아쉽다고 하셨다. 재재에게 뭔가 문제가 있으니 나나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재재도 겉으로는 너무나 건강해 보였을뿐더러 그때쯤에는 볼살도 토실하게 오르고 있어서 걱정스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썩어 들어가는 마음을 숨기고 관리사님들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방 안에서는 수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방 밖에 나갈 때는 그런 모습을 들키기 싫어 세수도 열심히 하고 일부러 밝게 다녔다. 우리 부부가 건강해야 장기전이 될 육아를 잘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펑펑 울다가도 정신이 들면 정원에 자주 나가 걷고 국민체조를 하기도 했다. 남편은 내 걱정이 됐는지 웬만한 곳은 같이 다녔다. 어떨 때는 유축 깔때기를 가지러 갈 때도 따라왔다. 나나의 면회 시간에 겹치지만 않으면 모자동실을 위해 재재를 데리러 갈 때에도 언제나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조리원 마지막 날 퇴소 교육을 하고 나서 남편이 짐 정리를 하는 동안 내가 정산을 하러 원장실로 갔을 때, 대화 말미에 원장님이 성경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셨다.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두 분을 보다 보니 그 말이 떠올랐어요"
피식 헛웃음이 났다. 순간적으로 뭔가 항변을 하려고 했다가, 관두었다. 진짜 웃음으로 표정을 고치고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원장실 유리벽에 비친 내 미소가 제법 자연스러워 보였다. 보기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