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용기가 없다.

사실은 잘 살고 싶다.

by 오늘


그 하룻밤 동안, 지금의 우리 애들에게는 절대 고백할 수 없는 미친 생각을 아주 집약적으로 몰아서 했었다.


당연히 처음엔 내가 죽을 생각이었다. 나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주의자인데, 사춘기 때 죽는 게 뭘까 상상하다가 너무 무서워서 밤마다 울었었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민하고 읽다가 그것과 관련된 대학 전공을 선택했었는데, 정말 내가 이럴 줄은 절대로 꿈에도 몰랐었는데, 갑자기 한순간에 지금 당장 죽고 싶어 진 것이다. 방법을 잠시 생각했다. 여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덜 고통스러운 건... 아 모르겠다 다 고통스럽지 않을까.


근데 잠깐. 나만 죽으면 어떡해. 남편이랑 애들이 남잖아. 남편이 다 감당해야 하잖아. 나를 잃은 슬픔까지... 안 되겠다. 애들을 죽이고 죽어야겠다. 그러려면 일단 애들이 퇴원한 후에 죽어야겠네. 근데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아 아무래도 죽이는 건 안 되겠다. 버려야겠다. 어디선가 착한 사람이 키워주길 바라야겠다. 둘째가 퇴원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동안 정이 들진 않겠지. 그럴 리 없다. 이런 마음상태로 이런 애들이랑 어떻게 정이 들겠어. 근데 버리면 처벌을 받으려나. 감옥에 가야 하나. 나 혼자 한 짓이라고 하고 감옥에 몇 년 갔다가 나와서 남편이랑 새 출발을 해야겠다. 자식은 절대 생각하지도 말고. 감옥 생활은 힘들겠지. 뉴스에 나려나.. 나와서도 온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겠지... 아니 이 상황에서 비난받을 걸 걱정하다니 나는 죽어도 싸다.


.... 뭐 이런, 정말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었다. 하지만 상상하는 중에도 사실 내가 저 중에 아무것도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았다. 내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고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막상 어떻게 아기를 버릴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기나 하고 싶으면서도, 인터넷 검색을 한 기록이 어딘가로 빠져나가 누가 나의 계획을 알게 될까봐 결국 검색창에 아무 말도 쓰지 못했다. 이런 왕 소심이가 무슨 범죄를 계획하겠는가. 그냥 이 삶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희망이 없는 삶,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며 언젠가 반드시 올 죽음의 쉼을 기다리는 삶이 될 것만 같았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의 자세한 장면을 상상해 보려 하면 미칠 것 같아서 조금 하다가 자꾸 그만두었다.


"혈압이 너무 높아요. 이상하네요."


새벽에 혈압을 재러 온 간호사 선생님의 말이었다. 몇 번을 다시 재도 혈압이 150대였다. 나도 처음 보는 수치였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다시 재봐도 아까보다 더 높은 157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이전의 내 기록까지 확인한 뒤 우선은 아침에 다시 재 보자고 하고 나갔다.


그때쯤 되자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기 어려웠는지 남편이 산책을 제안했던 것 같다. 겉옷을 입고 나가 병원 건물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입원할 즈음에는 아직 더웠는데 이제는 제법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찬기에 놀라 남편에게 몸을 바짝 붙이고 팔짱까지 끼고 걷고 있으니 어이없게도 우리가 연애할 때가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때는 우리에게 이렇게 먹먹한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산책도 하기 어렵겠지. 아닌가. 조리원 기간이랑 집에 산후관리사 이모님을 모시는 동안에는 가능하려나. 그럼 그때까지는 산책을 자주 해야겠다."


거기까지 얘기하다가 깨달았다.


사실은 계속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아주 많이 비참하고 불행하지 않을 방법만 있다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 정도면 괜찮다고 정당화하며 나름대로 잘 살고 싶었.


남편은 생각 정리를 빠르게 끝낸 듯했다. 우선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태가 아닐 거라고 믿는 듯했고, 만일 진짜로 아이들이 좋다고 해도 삶의 목표를 조금만 수정하면 된단다. 어떻게 이렇게 멋지게 단순할 수가 있는지. 그동안 바보같이 낙관적이라고 내심 비웃었던 날들이 씻겨 내려가고 남편을 처음으로 존경하게 된 순간이었다.


내 몸의 낙관 호르몬 분비는 이제 완전히 끝났는지 나는 계속해서 최악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와 둘째의 문제에 대해 너무 많은 검색을 하다 보니 이제 다운증후군은 마치 경미한 질환인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다양한 질병과 감염에 취약하고 지능도 낮은 편이고 평균 기대수명도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짧지만, 걷고 말하고 감정을 교류하고 심지어 많은 경우 교육을 통해 사회생활도 할 수 있는데, 아니 정말로 다 할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첫째가 문제였다. 이 아이는 어떻게 커갈까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뇌량만 없고 다른 부분이 괜찮을 경우에는 별일 없이 잘 자라는 경우가 많다는 논문을 읽었다. 하지만 반대로 뇌량만 없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발달이 되고 있지 않는 아기의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우리 첫째가 다른 문제를 함께 가지고 있을지 아닐지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다른 뇌 문제나 신체상의 문제가 동반된다면, 이는 염색체 이상이나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이 경우 발달장애와 지적장애를 피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 발달장애아 둘이 큰다면, 아이들을 어찌어찌 케어하느라 지치고 늙고 가난해진 우리 부부는 어떻게 행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우선은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남편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미래에 대한 전망이 훨씬 나아졌다.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장 내일 사고로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건데 먼 미래는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필요한 남은 것은 하루하루를 살게 할 작은 기대들이었다. 아이들이 아파도, 발달이 느리거나 아예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일부 하지 못해도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친구들에게 선물 받거나 물려받은 예쁜 내복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 (둘 다 가능)

-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배냇짓이면 둘 다 가능, 진짜 웃음은 적어도 둘째는 가능)

-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고 싶다. (가능)

- 젖을 한 번은 물려보고 싶다. (둘 다 가능하지 않을까)

-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고 싶다. (적어도 둘째는 높은 확률로 가능)

- 아장아장 걸어 나에게 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적어도 둘째는 가능)

- 엄마가 할머니가 되어 아이들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가능)

- 동생이 삼촌이 되어 아이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가능)

- 남편과 넷이서 가족사진을 찍어보고 싶다. (가능)


놀랍게도 하나하나 생각할수록 불가능한 것보다 가능한 것이 훨씬 많았다. 이렇게 많은 걸 기대할 수 있는데 혹시 내내 이렇게까지 절망적일 필요는 없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들의 소식을 듣고 나서 처음으로 희망이 생기고 있었다. (물론 이 이후에도 나는 수없이 절망으로 울다가 다시 희망적이었다가를 100번도 더 반복하게 된다.)


우리는 점점 옷 속으로 스며드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산책을 했다. 걸으면서 남편과 얘기하는 동안 나는 극단적으로 감성으로 치우쳤다 또 극단적으로 이성으로 치우쳤다 하면서 그래도 머리에 환기가 된 느낌이었다. 병실로 돌아오니 더 이상 이명이 들리지 않았다. 아침에 잰 혈압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서 나는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





< 덧붙이는 이야기 >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진 빚 때문에 집안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우리 집이 망했구나! 하며 나는 엉엉 울었고 동생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엄마와 누나가 우니 따라 울었다.


그 무렵의 또 다른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 년 넘게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것이다. 피아노 학원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봐도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많은 초딩들이 그렇듯 한 때는 재미있었던 피아노 치기가 수준이 올라갈수록 재미없고 지겹고 하기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던 날의 장면이 기억나진 않아도 나는 분명 홀가분하고 기뻤을 거였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에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한 것이 엄마에게 한으로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엄마 난 근데 진짜 다니기 싫어서 그만뒀잖아요. 어차피 더 다녔어도 끝이 안 좋았을 텐데"


엄마는 놀라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너는 피아노 학원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서는 원장선생님이 해 주시는 저녁밥까지 얻어먹고 왔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려는데 갑자기 원장실 그랜드피아노 위에 있던 밥솥에서 김이 올라오던 장면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는 내가 너무 매일 저녁밥을 얻어먹고 오는 것이 민망해서 학원에 여러 번 김치를 갖다 드렸다고 했다.


알고 보니 엄마가 우리 집의 어려워진 사정을 고백하던 날, (엄마는 어린 우리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정신을 못 차리던 아빠에게 충격요법을 쓰기 위해 이렇게 했던 거라며 두고두고 이 날을 후회하셨다.) 나는 대뜸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어린 내 생각으로는 집이 어려운데 나를 학원에 보내는 것이 큰 부담이 될 거라고 느꼈나 보다. 엄마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대신 장난감을 두 개 사고 싶을 때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나만 고르면 그게 우리 가족을 도와주는 거라고 하셨단다. 그렇지만 나는 완강하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했고, 그럼에도 학원을 보내면 내가 떳떳한 마음으로 전처럼 즐거워할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원장 선생님께 전화를 하셨단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아직도 그 피아노학원 계단이 끔찍이 싫은 이미지로 남아있다는 것 때문이다. 어쩌면, 오후 일찍 가서 저녁까지 먹을 정도로 오래 머무르며 좋아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는 것이 8살이었던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 방어기제가 피아노 학원은 끔찍한 곳이고, 나는 끔찍한 곳에서 해방된 행복한 아이인 것으로 기억을 조작해 버린 거다.


이제와서는 그 당시의 내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덕분에 쓸데없는 미련과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고 살아왔다. 사실을 알았더라도 뭐, 피아노 학원을 계속 다녔다고 내가 피아니스트라도 됐겠는가. 어차피 얼마간을 더 다녔든 지금 와서는 똑같이 다 까먹었을 거다.



나라는 개체는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의 병명을 의심하고, 진단을 기다리는 동안 수없이 검색하고, 죽음을 떠올리고, 아이들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런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음식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고, 쓰러지듯 잠을 잤다가 눈을 뜨자마자 소금기로 거칠어진 얼굴 위로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하던 순간이 물론 아프게, 틈틈이 남아있기는 하다. 그런데 막상 제대로 떠올려보려고 하니, 왠지 아주 심하게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고 멀어서 나는 더이상 그 기억으로 눈물짓지 않는다.



대신 그 당시의 기억 중 가장 선명하여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는 것은, 그날, 병실에서 내가 또 한 차례 절망에 사로잡혀 아이들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늘어놓고 있는데 문득 끼어들어오던 남편의 말과, 그 순간의 표정과 말투, 목소리이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근데, 어쨌든 우리 애들 진짜 이쁘지 않아?"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있다가, 다가온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맞아..." 하는 말을 토해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