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데 슬프다.
처음 아이들의 문제를 알게 되고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거의 하지 않던 시점에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휴대폰을 끼고 살았다. 아이들의 진단명에 관해 검증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했다. 발달장애 아동과 관련된 정보나 컨텐츠를 발견하면 홀린듯이 몇 번씩 봤다. 수많은 염색체 및 유전자 질환에 대해 검색하며 증후군 도사(?)가 되어가는 동안 이렇게나 수많은 유전질환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속상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 들었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분투하고 있을 희귀질환 아동 부모들에게 유대감이 절로 생겼다.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검색을 할 때마다 자꾸 보이던 장애 보호자 카페에 가입을 했다.
일단 가입을 하니 가장 낮은 등급이 주어졌다. 되는대로 낮은 등급에서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도 먼저 읽어보기 시작했지만 금세 갈증이 났다. 재재와 나나에 관련된 진단명을 검색해서 나오는 글들 대부분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페에 있는 모든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등급을 올리려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인터넷에 올린 글보다 훨씬 많은 수의 게시글을 써야 했다. 모임의 특성상 등급 올리기가 힘든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가 갔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았는데 알고 보니 그 앞에 있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가장 낮은 등급에서만 탈출해서 조금 더 많은 글을 보자 생각하면서 일단 인사글을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나역시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글에 처음부터 아이들의 진단명을 밝히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여행 카페같은데서 정보를 얻으려고 등업게시판에 올리던 글처럼 달랑 안녕하세요~ 잘부탁드려요~ 하고 쓰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 같아 마음이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조리원에서 첫 글을 겨우 썼다.
아이가 너무 갖고싶었는데, 그 마음을 후회하는 제가 미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행복은 제 마음이 결정하는거니까 한번 잘 해보려고 가입했습니다.
모두들 꼭 행복하세요!
그 다음날 또하나의 글을 썼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면회가는 것이 좋으면서 두렵다는 내용의. 그 열흘 후쯤에는 이 공간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는 감사의 글을 썼다. 글이 거듭될수록 더 정성스러운 댓글들이 달렸다. 한 마디에 열 마디 이상의 마음이 느껴지는 댓글에 텅 빈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등급을 올리는 것보다 그 따뜻하고 실질적인 댓글을 기다리며 그곳에 글을 쓰게 됐다.
그렇게 지금까지 나는 그 카페에 60개의 글을 썼다. 어떤 날은 대학병원 외래와 관련된 질문, 어떤 날은 재재의 경련 의심증상에 대한 이야기, 또 어떤 날은 내 처지에 대한 푸념, 그리고 우리 애들의 더디지만 소중한 발달 이야기도. 어느 글에는 나나의 뒷모습 사진을 올리기도 하고, 재재의 손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리고 살면서 한 번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그 공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털어 놓으면서 때로는 숨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고 또 읽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나나와, 또 재재와 직접 관련된 환우회 모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가입하고 나서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인사글을 썼다.
학창시절 새학기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악몽을 꾸던 나는,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에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내가 가장 신기하게 느끼는 인간의 행동 중 하나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 동호회 같은 데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인생은 알 수 없다고, 내가 그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24년생 다운증후군 아가들을 키우는 부모 톡방에 들어가,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활발히 대화에 참여하는 중이다. 실제 모임에도 한 번 참여했고, 곧 또 있을 모임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재재의 환우회 모임에도 들어가 때때로 긴 글을 쓰고 그곳의 엄마들과도 애틋하게 소통했고, 얼마 전 정모도 재재와 함께 참여했다. 당연히 낯선 사람들인데 처음 본 순간 이상하게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이들을 낳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을 얻고 하며 생각해봤던 모든 것들을 그들은 완전하게 이해하고, 또 알고 있었다. 온전한 공감덕에 나는 마음껏 말하고 들으면서 치유되는 것 같았다.
이 새로운 소속감은 너무나 포근하고 다정해서 순식간에 이 곳들은 나의 따뜻한 내집단이 되어주었다. 너무 좋은데, 그렇긴 한데 문제는 그래서 때로는 이 안에만 살고 싶다는 거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랄수록 내가 점점 더 이 안에만 살게 될까봐 겁이 난다는 거다.
나나가 발달해 가는 모습이 다소 느리긴 하지만 평범한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보게 되면서, 내년 어느 시점부터는 나나를 어린이집에 보내볼까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는 약간 외진 위치에 있어서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어린이집은 한 군데밖에 없다. 더 멀리 장애 통합 어린이집이나 장애전담 어린이집을 알아볼 수도 있지만 우선은 가까운 일반 어린이집부터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몰라도 매일 보내야 하는 어린이집인데 가까운 곳이 제일이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일반 보육시설에 잘 다닌다.
결론은 퇴짜였다. 병원에서도, 내 지인들에게도, 재활 치료사 선생님들에게도 환영과 귀여움만 받는 나나를 보면서 내가 너무 낭만적이었나보다. 전화로 상담을 하면서 아이가 다운증후군이 있다고 밝혔을 때, 한동안 당혹의 정적이 흐르다가 그런 아이를 돌보아 본 경험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말 자체에는 긍정의 의미도 부정의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서부터 거부감을 알 수 있었다. 각오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내 아이가 그 존재만으로 거부당하는 첫 경험은 생각보다 아파서 나도 모르게 날이 섰다.
아.. 껄끄러우시면 저도 안 보내는게 좋을 것 같아요. 저희 아이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더 큰 자괴감이 뒤따랐다.
원장은 자신이 조금 더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통화를 마무리했다. 뭘 알아보겠다는 걸까. 다운증후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겠다는 걸까. 주변 어린이집에 다운증후군 아기를 돌보아 본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걸까. 아니면 어떤 특성으로 인해 아이를 거부했을 때 자신에게 뒤탈이 있을지 알아보겠다는 걸까. 오랜만에 마음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며칠 뒤 나나의 목욕물을 받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의 어린이집은 나나를 수용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 것 같단다. 더 좋은 환경으로 가기를 바란단다. 무언가 더 이야기가 들리는데 그 중간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발가벗고 욕조에 누워 방긋 웃는 나나의 말간 얼굴에 대고 "아이 우리 나나 예쁘다" 하며 조금 울었다. 살면서 속하게 되는 당연스런 집단들에서 한 번도 거부당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 수많은 집단에서 슬그머니, 혹은 대놓고 거부당할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또 무엇을 각오해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내 안에서 먹구름처럼 불어나려 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나나는 평소처럼 목욕을 하며 비누 묻은 손을 입에 넣으려 하고, 따뜻한 물이 배 위로 쏟아질 때마다 눈을 깜짝거리며 놀라는 표정을 하고, 탕에서 물에 대고 손을 찰박거리다가 앞으로 엎어질 뻔 하면서 코로 조금 들어간 물을 코딱지와 함께 뱉어내서 나를 웃겨 줬다. 씻기고 로션을 바르고 새 옷을 입히고 나서 나나를 안고 사과했다. 미안해. 사실 엄마가 당당하지 못해서 그랬나봐. 생각해보니까 실은 너무 쫄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나나가 때맞춰 내 가슴팍을 한번 툭 치고 웃었다. 다 알아 엄마. 하는 것만 같았다. 집앞의 어린이집 원장에게 무례했다고 사과를 할까 하다가 그건 또 그것대로 오바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며칠 뒤 나나의 감각통합 치료를 시작하려고 집 근처의 발달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어린이집에 전화할 때와는 달리 마음이 너무 편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대면상담 일정을 잡았다. 나나는 그곳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내년 쯤에는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장애전담 어린이집에 재재와 나나 모두 상담을 할까 싶다. 그 곳에서는 불필요한 당혹감 없이 절차대로, TO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을 받아줄 것이다. 원래도 그러려고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이들을 세상에 속하게 해야지. 길에 돌아다니는 장애인이 이렇게 없는게 후진국의 반증이라며 우리 나라의 장애 인식에 대해 비판했었는데, 정작 내 아이들이 장애를 갖게 되니 조금의 용기도 못 내고, 내가 이해받을 수 있는 곳에서만 맘껏 조잘거리고, 막상 진짜 세상에서는 작디 작은 걸림돌에 주저앉아버리고, 이게 뭔 부끄러운 행동인가.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그렇지만 아직 지혜가 모자라서 그런가 내가 속한 이 세상에서 그러려면 내가 투사로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그렇게 살 용기가 좀처럼 없다. 한때 잠시는 죽을 생각까지도 했었는데, 미움받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 있는 제도 안에서, 제약이 있으면 제약이 있는대로 속상해하면서 하소연하면서 맘 편히 사는게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다. 은근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어느 순간엔 각성을 하게 되려나.
고민을 하다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놔 본다. 내 안의 여러 마음들 중 특히나 검은 부분에 속하는 것 같다. 장애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이 마음을 읽고 나면 어떤 생각을 할까 조금은 걱정도 된다. 유튜브 동영상에 장애인, 특히 발달장애인 관련된 영상이 뜨면 댓글에 꼭 이런 내용이 있다. 누가 칼 들고 애 낳으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좋아서 애를 낳아놓고는 발달장애인이 나오니 나라에서 책임지라 한다고. 글쎄, 내 생각에 그들은(우리는)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가 아프던, 발달에 문제가 있던, 그냥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출발선을 가지고 나름대로 평범하게 세상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현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고, 그들은(우리는) 그럼에도 대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만, 때때로 무척 슬프고 버겁다.
가끔씩 나와 아이들의 10년 뒤, 20년 뒤가 궁금하다. 나의 소속감은 주로 어디를 향해 있게 될까. 나는 여전히 내 울타리들 안에서 비겁하고 행복하게 안온할까. 갑자기 갈 길이 멀게 느껴진다. 그냥 나는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