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에게는 도벽이 있다. 어릴 때 종종 문구점에서 몇 백 원짜리 물건을 훔쳐서 부모님께 호되게 혼난 경험이 있다. 크면서도 간혹 타인의 물건이나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몰래 슬쩍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딱히 돈이 부족했다거나 엄청나게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짓을 가끔 저질렀다. 심지어 소질이 있는지 잘 들키지 않아서 더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나쁜 생각들을 누르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유럽 여행 중 베를린 한인 민박에 묵으면서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어쩌다 보니 다음 여행지가 체코라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하루 간격을 두고 체코 프라하에서 만난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주류 판매점에 들어가 환전을 시도했다. 그런 가게에서 환율을 잘 쳐준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류 판매점의 남자는 생각보다 낮은 환율을 불렀다. 아니, 우리를 뭘로 보고? 라며 친구와 함께 공시된 환율대로 안 해주면 옆에 있는 환전소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기대와 다르게 그는 쿨하게 그러라고 했고, 머쓱해져서 바로 옆에 있던 환전소로 갔다. 환전소에서 환율을 확인하고 유로를 내밀었는데, 받아 든 체코 화폐는 계산한 것에 비해 몇 장이 부족했다. 잘 되지 않는 영어로 항의를 했으나 환전소 직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작은 유리판을 사이에 두고 몇 분 간 실랑이를 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환전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그것도 공식적으로. 사기를 당해 사기가 꺾인 와중에 또 술은 사겠다고 주류 판매점에 다시 갔다. 주류 판매점의 남자는 ‘내가 뭐랬어? 너네 나 안 믿고 사기당할 줄 알았다.’는 뉘앙스의 대사를 쳤다. 그의 비웃음 가득한 조소는 상처 난 마음에 굵은소금을 문지르는 듯해 우리는 더 기가 죽었다.
위로가 필요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기를 당한 돈도 없는 어린 대학생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뭔가가 필요했다. 매콤하고 칼칼하고 달달해서 코와 혀를 깨우고 쓰라린 영혼마저 깨우는 조국의 따뜻한 위로.
베를린 동지들이 비행기에서 먹지 않고 가져온 고추장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떡볶이를 떠올렸다. 씁쓸한 마음을 반드시 떡볶이로 달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생겼다. 문제는 떡볶이에 많은 조미료가 들어간다는 것이었는데, 조미료를 최소로 줄여 봐도 단맛을 낼 설탕은 필요했다. 한 그릇의 떡볶이를 위해 대량의 설탕을 살 순 없었다. 비웃음과 사기 사이 길에 서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길 건너편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나는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스타벅스에 설탕 같은 거 비치되어 있지 않아?”
그렇게 우리는 사뭇 비장하게 스타벅스로 향했고,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나의 임무가 바로 설탕을 훔치는 것이었는데, 그간의 경험 덕인지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설탕 세 봉지를 집었다. 내가 눈짓을 하자 음료를 시키는 척 서 있던 일당들은 슬그머니 줄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치고 흠잡을 데 없는 팀워크였다. 설탕 절도 사건의 공범자가 된 우리들은 스타벅스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 내내 낄낄거렸다. 프라하의 고풍스러운 골목에 비밀스러운 흥분을 묻혔다.
원래는 커피에 들어가 동그랗게 녹을 운명이었던 설탕은 매운 고추장 국물에 대책 없이 휘저어졌다. 재료는 떡, 어묵, 기내용 고추장, 스타벅스 설탕뿐이었는데 떡볶이는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떡볶이 한 냄비를 가운데 두고 스타벅스를 위해 건배했다. 냄비 바닥까지 긁어먹으며 금세 휘발될 가벼운 얘기들로 공기를 채웠다. 나쁜 짓의 공모는 어색했던 우리 사이를 메워 여행의 모양을 예상치 못하게 바꿨다. 베를린 동지들은 여행의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고춧가루와 설탕의 조합이 흔들리는 청춘들의 무언가를 깨웠는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여행에서도 많은 요리를 했지만 유독 그날의 떡볶이를 잊을 수 없었다. 훔쳐낸 설탕 세 봉지가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는 맛이었다. 우리는 먹고 마시며 환전사기의 기억을 떨쳐냈다. 소소한 행복 앞에서 그 정도는 큰 사건도 아니었다. 프라하의 예쁜 정경보다는 그 밤의 사소한 장면들만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북적이던 스타벅스의 조도와 입구에 비치되어 있던 설탕과 빨대, 냅킨 같은 것들. 죄책감이 깃든 흥분으로 걸음을 재촉했던 돌길. 좁은 부엌에서 보글보글 끓었던 떡볶이. 나쁜 짓으로 영웅이 되었던 순간. 그 뒤로 스타벅스의 설탕을 탐내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가지런히 정돈된 설탕 봉지들을 보면 어김없이 그날의 도벽이 떠오른다. 설탕 세 봉지를 훔쳐내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떡볶이의 밤.
2023. 6. 29.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