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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Jun 26. 2023

폭우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인간이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는 단단하고 멋있는 인간이 되기는 글렀다. 고작 날씨 따위에 이리저리 휘둘리니까. 휘둘림의 결이 일정하지도 않다. 맑으면 대체로 좋지만 너무 쨍한 날은 오히려 슬프기도 하다. 비 오는 날은 깊이 침잠하는 편이고, 비가 오기 전이나 후의 우중충한 상태가 가장 좋다.

 

  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비를 싫어하진 않는다. 비 오는 날은 싫다기보다는 귀찮다. 우산을 든 손이 자유롭지 않고, 옷이 젖어 달라붙고, 바닥은 미끄럽고, 우산에 치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집을 나서기 전에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하루치 기분을 망칠 수 있다. 그래도 이건 비 오는 날 밖으로 나가는 경우에 한해서다. 

내내 집에만 머물 수 있다면 비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한 겹의 창문 너머로 빗소리를 듣는다. 이럴 때는 차라리 엄청나게 쏟아붓는 비가 좋다. 물 입자들이 여기저기 쉴 틈 없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따라서 같이 가라앉는다. 여기저기 생기는 웅덩이처럼 기분은 계속해서 고인다. 비에 젖은 감정이나 기분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수직으로 꽂히는 비처럼 계속해서 내면으로 침잠하다 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외로움이나 쓸쓸함, 그리움이나 부끄러움 같은 것들. 미처 하지 못한 고백이나 까끌거리는 미움, 혼자 서운해하다가 지치는 마음 같은 것들. 비 오는 날 수집한 감정의 조각들은 그대로 노트에 박제해 둔다.      

 

  최대한 비를 맞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의도치 않게 엄청난 폭우를 그대로 맞아본 경험이 있다. 

몇 해 전 여름에 친구와 태국으로 여행을 갔다. 우리는 태국의 교통수단인 ‘툭툭이’에 빠졌다. 조금은 허술한 모양의 자동 인력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천장은 있으나 사방이 뚫렸고 운전자에 따라 외형이 제각각이었다. 우리는 가장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툭툭이를 발견하면 마치 자석처럼 끌려갔다. 굳이 따지자면 택시보다 저렴한 편도 아니었으나 에어컨보다는 자연의 바람을 마시며(매연도 함께 마시며) 방콕 곳곳을 돌아다녔다. 

  마지막 날의 숙소는 차오프라야 강 건너에 있었는데, 방콕 시내에서 놀다가 어김없이 가장 화려한 툭툭이를 탔다. 시원한 밤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감성에 젖어 있었는데, 옷도 젖기 시작했다. 동남아의 비는 어떠한 예고도 없이 그냥 들이붓는다. 처음엔 웃겨서 동영상을 찍었다. 운전기사랑 농담도 주고받았는데(오, 레이닝! 이츠 레이닝! 예~~) 멎을 기세 없이 더 세차게 내렸다. 비를 덜 맞기 위해 친구와 좌석 중간으로 딱 붙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내리는 폭우였는데 그걸 사방이 다 뚫린 차 안에서 맞고 있는 게 어이없었다. 그날 우리가 선택한 툭툭이는 태국에서 만난 그 어떤 툭툭이 보다 개방적이었다.

택시라면 비를 맞지 않았겠고, 걷고 있었다면 어딘가로 피했겠지만 우리는 들어오는 모든 비를 얌전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툭툭이의 속도로 인해 비는 더 세차게 우리를 때렸다. 핸드폰이 침수될까 봐 급히 가방에 집어넣고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툭툭이는 택시만큼 빠르지 않았고, 빗길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우리는 체념하고 비를 온전히 맞았고,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길가의 현지인들이 엄지를 들어 올려줬다. 

  강을 건너는 다리는 어찌나 긴지. 하필이면 마지막 날 호화롭게 즐겨보겠다고 과감하게 5성급 리조트에 1박을 예약했는데,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입구만도 엄청나게 길었다. 호화 리조트에 툭툭이를 타고 온 사람들은 우리뿐이었다. 우리의 폭우 동지에게 미안함과 안전을 당부하며 택시보다 비싼 값을 전해주고, 로비에 발을 들이는데 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헨젤과 그레텔마냥 물 자국을 찍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속옷까지 홀딱 젖었다. 그저 얌전히 앉아만 있었는데, 누가 봐도 비에 뛰어든 모양새였다. 그런 우리가 너무 웃겨서 친구랑 한참을 웃었다. 평소에는 어떻게든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산도 바람 방향 따라 틀어대는 애들이 어쩌다 툭툭이에 빠져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젖은 옷을 힘겹게 벗어내고 샤워를 하면서 왠지 모를 개운함을 느꼈다. 이렇게 폭우를 맞아도 별로 큰일이 아니구나,라는. 살다 보면 비에 홀딱 젖는 일도 생기고, 사방이 뚫린 차를 타는 일도 생긴다. 비를 피하지도, 가다가 내리지도 못하면 그냥 다 맞을 수밖에 없다. 대리석 바닥에 물을 좀 흘리고, 쏘리를 반복하긴 했지만 별 일 아니었다. 젖은 옷은 벗고 씻어내면 그만이었다. 다음날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고 화창했다. 마치 태양을 더 깨끗하게 비추기 위해 비를 내린 것처럼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쨍한 날씨였다. 비만 계속 오는 날씨는 없었다. 언젠가는 그칠 비였다.


  묵은 감정이 깊은 곳에 고여 나를 괴롭힐 때,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나를 옭아매고 놔주지 않을 때, 그 폭우를 떠올린다. 한 번 시원하게 맞고 나면 끝난다. 별 일도 아니다. 찝찝한 옷이나 사람들의 시선, 불편함이나 부끄러움도 씻어내면 그만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비에 씻긴 풍경은 더 깨끗하고 짙은 색으로 빛난다. 온몸으로 비를 맞아본 사람은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게 별 일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2023. 6. 2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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