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언제나 서투르다. 그래서 엉망진창이지만 그래서 오래 마음에 남는다. 고등학교에서 연수로 떠났던 미국을 제외하고 보호자 없이 떠난 첫 해외 여행지는 유럽이었다. 가까운 나라부터 2박, 3박 차근히 경험을 쌓아가는 주변 친구들과 다르게 겁도 없이 한 달 반의 머나먼 여정을 선택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조금씩 모았던 코 묻은 돈들, 휴학하고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월급까지 기꺼이 쏟아부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떠나고 싶었다. 비행기 표부터 끊어놓고, 보수적인 아빠를 설득하다 출발일이 다가와서야 허락을 받았다. 원체 계획성이 없는 탓에 표만 끊어놓고 허둥지둥거렸는데 정신 차려 보니 이미 나는 런던행 SU250 비행편의 승객이 되어 있었다.
출국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심각하고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급진 이슬람 테러 집단의 테러로 인해 프랑스 파리 바타클랑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죽어나갔다. 양심의 가책도 없는 듯 테러 집단은 다음 테러를 예고했고, 유럽각국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며칠 남겨두고 여행을 취소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어떻게든 가보자고 캐리어를 끌었는데 바퀴가 부서져버렸다. 시작도 전에 여행이 망할 징조 같아서 불안하고 신경 쓰였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가고 싶을 때 가야 한다며 큰소리쳤지만, 사실은 우리가 타는 비행기도 불안했다.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다가 괜찮은 항공권을 전부 놓치고 급하게 러시아 항공의 저렴한 항공권을 구매했다. 그리고 떠나기 얼마 전, 러시아의 항공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테러 집단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러시아에 대한 테러범들의 경고가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왜 우리는 하필 러시아 항공을 택한 것인지 후회가 막심했다. 게다가 러시아 항공의 승무원들은 불친절하고, 수하물 분실도 잦으며 연착을 밥 먹듯 하기로 악명 높았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의 승무원들을 보고 후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러시아어는 나를 더욱 두렵고 소외되게 만들었다.
폐쇄된 공간에 공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착륙 시에 불안을 느낀다. 이륙하고 나면 괜찮아져서 비행기도 멀미를 하나 싶었다. 아침부터 캐리어 때문에 진땀을 흘려 몹시 피곤했다. 며칠간 이어진 불안과 두려움이 피곤과 결합되어 엄청난 공포를 만들었다. 이륙이 시작되기 전부터 친구의 손을 붙들었다, 좌석 손잡이를 잡았다 하며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겪어본 적 없는 공포는 더 심한 공포를 불러왔다. 이륙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속을 다독이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던 찰나, 들어본 적 없는 강한 발음의 영어가 들렸다. 한 승무원이 내가 잘 알아듣길 바라는 표정으로 단어의 음절 하나하나를 띄워 말했다.
“알 유 오 케 이 ?”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지 물과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의 동태를 살피는 듯했다. 기내식을 먹고 있을 때도 ‘괜찮아?’ 물어보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잘 때 멍하게 깨어있어도 ‘괜찮아?’ 물어봤다. 그게 다였다. 러시아 특유의 억양이 섞인 서늘한 말투였고, 내가 ‘괜찮아’라고 하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관심과 걱정 덕분에 정말로 ‘괜찮아’ 졌다. 물론 그게 그들의 일이지만, 낯선 외국인이 주는 한 마디의 서툰 영어가 이상하게도 공포를 잠재웠다. 그녀에게 고마워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답해주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4시간여의 비행 후 경유를 위해 모스크바 공항에 잠깐 멈췄다. 단출하게 꾸린 가방 속에 든 것은 별로 없었으나, 그녀가 관심을 보인 것 같았던 시트 마스크 팩을 주고 싶었다. 나가는 문 앞에서 조금 수줍게 팩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녀는 멀뚱히 쳐다봤고, 당황한 나는 뒤에 나오는 승객들에 밀려 우물쭈물했다. 얼굴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흡수시키는 제스처를 하며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띄워 말했다. 내 마음을 잘 알아듣길 바라며.
“프 레 젠 트 !”
그제야 그녀는 예쁘게 웃으며 내가 내민 팩 꾸러미를 받았다. 그리고 답했다.
“땅큐!”
그녀의 강한 악센트를 듣고 뿌듯한 마음으로 내리려는데, 그녀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알 유 오 케 이 ?”
끝까지 나를 걱정해 주는 그 마음과 음절을 띄우는 배려에 감동한 나는 웃음이 터졌고, 밝게 웃으며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아임 오케이! 땡큐!”
그러자 그녀도 환하고 예쁘게 웃었다. 친구는 영어를 못해서 저렇게 띄엄띄엄 말하는 거냐고 웃었지만, 내게는 최고의 영어였다. 테러 사건도, 비행기 추락 사건도, 캐리어 바퀴가 빠진 것도, 수많은 부정적인 후기들도 전부 그녀의 서툰 영어 한 마디가 말끔하게 지워냈다. 승무원을 그저 기내 서비스와 안전을 제공하는 사람으로만 알았던 나는 그날 진정한 승무원을 만났다. 표정과 말투로 친절함을 꾸며내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승객을 걱정하고 신경 써주는, 그러한 진정성으로 불안한 승객을 안심시켜 주는 진짜 승무원.
모스크바 공항은 인천공항에 비해 작고 어두웠다. 적막하고 건조한 공기가 감도는, 공항 안에도 러시아의 칼바람이 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더 이상 러시아어가 날카롭게 들리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의 무표정도 차가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떠나기 전보다 훨씬 안정되었고, 공항에서 직원들을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잠깐의 경유가 끝나고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되었을 때,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9시간의 긴 비행이 아직 남았지만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안과 걱정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내가 가게 될 곳에 대한 기대와 상상으로 가득 부풀었다. 첫 여행은 서투르고 엉망이었지만 무사하고 행복하게 마치고 돌아왔다. 오래도록 남을 여행의 시작에는 그녀의 서툰 한 마디가 있었다.
2023. 7. 5.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