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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Oct 20. 2023

짝사랑

  엄마는 평생 동안 자식을 짝사랑하는 존재다. 그들의 짝사랑은 자식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자식이 씨앗 같은 모양으로 뱃속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난생 처음 ‘엄마’라는 명함을 가지는 순간부터. 그래서 자식들은 언제까지나 엄마의 짝사랑을 따라잡을 수 없다.

  어떻게 자랄지도 모르면서 보이지도 않는 것에 사랑을 쏟는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책도 열심히 읽고 온기를 보내듯 정성껏 쓰다듬는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만 하려고 애쓴다. 그들이 그렇게 애쓰는지도 모르고 씨앗 같은 것은 모든 것을 흡수하며 쑥쑥 자란다.      

 

  그녀의 자식이 세상에 나기로 예정된 날은 12월 25일. 성탄이라 불리던 아이는 날 때부터 성실하기로 작정했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을 맞춰 진통을 보내온다. 1992년엔 제왕절개 수술이 유행처럼 번졌고, 축복이 가득한 날에 아이를 낳고 싶은 부모들은 벌써부터 병원에 가득하다. 해서 갈 곳을 잃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눈발이 날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아이를 낳기 위해 길 위를 헤맨다. 날은 춥고 택시는 잡히지 않고 진통은 점점 심해온다. 태어나 처음 겪는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앉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은 똑바로 서라고 다그친다. 추위와 기다림, 고통과 서운함의 밤을 필사적으로 견뎌내고 그녀는 마침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성탄절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순하고 얌전해서 키우기에 어렵지 않다. 울거나 투정하지 않으며 젖병만 물려주면 알아서 먹고 혼자 잠든다. 성장속도가 빠른 아이는 백일이 되기 전에 말을 시작하고, 돌이 되기 전에 걷는다. 동네에서 영재소리를 듣던 아이는 야무지게 자라 학교에 간다. 12월생인 아이의 또래보다 한 뼘쯤 작은 키가 그녀를 속상하게 해도, 아이는 선생님의 예쁨과 백점짜리 받아쓰기 시험지를 받아온다. 그녀는 아이를 위해 맛있는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는 간식을 허겁지겁 먹으며 학교에서의 일을 조잘조잘 떠들어댄다. 아이는 모든 것을 내보이는 일기를 그녀와 함께 써내려간다. 아이는 그녀의 자랑이 된다.      

 

  착실히 공부하며 모범생으로 자라던 아이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방문을 닫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더 이상 학교에서의 일을 말하지 않으며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수다와 애교가 가득한 딸은 사라지고 낯선 사춘기의 자식을 맞이한다. 아이의 일기장엔 자물쇠가 걸린다. 고등학교 진학문제로 크게 다툰다. 이해하지 못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아이는 화가 나면 입을 닫는다. 달팽이가 껍질 속에 웅크려 들어가듯 몸을 숨기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고등학교 진학 후 그녀의 아이는 잘 웃지 않고 말수가 줄어든다. 그녀는 피곤해하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머리를 말려주고 어깨를 주무르지만, 아이의 내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공부를 잘했던 아이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결국 입시에 실패한다. 뒤늦게 머리를 싸매고 여기저기 원서를 내보지만 끝내 재수를 결정한다. 그녀는 입시에 문외한이었던 자신을 탓해본다. 재수학원에 가기 전 날, 아이는 친구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고 진탕 취해 들어온다.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는 서러움과 억울함을 토해내고 그녀는 그런 아이를 달래고 재운 후 몰래 운다.      

 

  대학생이 된 아이는 통금 문제로 짜증을 낸다. 그녀는 험한 세상에 아이를 풀어놓기 겁나고, 아이는 더 넓은 세상을 맘껏 즐기지 못해 답답하다. 아이는 외모와 옷차림에 신경 쓰며 비밀을 간직한 홍조를 띄운다. 아이에게 봄의 바람 같은 기운이 돌지만, 그녀는 자세히 묻지 못한다. 괜한 것을 물어 다시 마음을 연 아이와 멀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마음은 잔소리가 되고, 지나친 보호가 된다. 더 궁금한 마음은 숨기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온전한 마음을 터놓지는 못한 채 그럭저럭 사이좋은 모녀로 지낸다.     

 

  아이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 느지막이 한 회사에 취직한다. 그와 동시에 회사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 그녀의 집에서 나간다. 아이의 터질 듯 했던 옷장이 텅 비고, 엄청난 양의 화장품과 자잘한 짐들이 방에서 사라진다. 아이가 나가고 그녀는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낀다. 아침에 동네 뒷산을 오르다가,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빨래를 개다가, 잠을 자다가 공허함은 갑자기 무너지는 돌탑이 되어 마음을 우르르 때린다. 그녀는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고 혼자 조용히 운다. 



 아이는 이제 그녀의 집에 손님처럼 잠시 다녀간다. 아이가 머물다 돌아갈 때쯤, 그녀는 이것저것을 챙긴다. 먹고 싶은 반찬은 없는지, 필요한 물건은 없는지. 무겁게 들고 가는 어깨가 안쓰러워도 바리바리 싸서 보낸다. 가는 뒷모습을 창문으로 내다보며 손을 흔든다. 그걸 모르는 아이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멀어져간다. 그녀는 아이가 보지 않아도, 건물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든다. 흔들리는 손을 바라보며 문득 떠올린다. 그녀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결혼과 동시에 먼 타지로 와버려 명절 때만 겨우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벌써 가냐며 서운해 하던 사람. 짧은 만남 뒤에 늘 양손이 무겁게 챙겨주던 사람. 떠나는 차 뒤꽁무니에 대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던 사람. 그녀가 씨앗 같은 모양으로 존재한 그 순간부터 받아온 짝사랑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된다. 그로부터 받은 짝사랑을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식은 언제까지나 엄마의 짝사랑을 따라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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