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기대를 안고 첫 출근을 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본부의 본부장님인 전무님을 뵈었을 때 아주 기뻤다.
면접을 볼 때, 따뜻한 눈빛과 친절한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시던 분. 그러면서도 냉철한 질문을 던지시던 그분이 나의 상사였다.
작고 깡말랐지만 왠지 모를 포스를 풍기던 분. 짧은 커트머리가 유난히도 잘 어울리던 분. 나와 같은 사원들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높은 직급의 사람들에게 되려 엄격하셨던 분. 카리스마 있게 상황을 정리하고, 업무를 지시하며 4개의 부서를 유연하게 통솔하시던 분.
20대에 처음 회사에 들어와 창립멤버로 한 회사에서만 20년 넘는 세월을 바쳤다고 하셨다. 사원부터 시작해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여성으로서 임원이 되었다. 그래서 전무님은 실무자와 결재자로서의 역량을 모두 갖추셨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늘 마지막에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주말에도 일하기 위해 나왔고, 일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일처리가 빠르고 정확해 대표의 신임을 얻고, 인품이 좋아 아랫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성공한 멋진 커리어우먼의 표본이었다.
나는 그녀를 나의 롤모델로 삼았다.
'나도 저렇게 멋진 직장인이 되어야지.'
수습면접에 합격했을 때, 나는 전무님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전무님 같은 분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이제 정직원이 되었으니 더 열심히 배워보겠노라고.
전무님은 그 패기 넘치는 문자에도 다정함을 가득 담아 답장을 주셨다.
그리고 나의 롤모델은 대표의 눈밖에 나게 되었고, 상세한 설명 없이 퇴사를 결정했다.
한 회사의 전무가 퇴사하는 걸 사원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었지만, 분하고 서러웠다. 부서원들 누구도 명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퇴사하는 정확한 날짜조차 몰랐다.
그녀는 내가 꿈꾸던 이상향이었고, 내가 향해갈 곳이었다. 그녀처럼 일해서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 바람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나는 심하게 동요했다. 인자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나의 롤모델은 이미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토요일부터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두근거려. 월요일에 출근하는 게 끔찍하게 싫어. 그래서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왔다. 20년을 이렇게 살았으니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이제는 나도 좀 편하게 자고 싶다."
강하고 멋지게만 보였던 나의 롤모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
회사를 20년 넘게 다녔는데도, 여전히 출근이 싫은 보통의 직장인.
나는 내 멋대로 그녀에게 프레임을 씌워 그녀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사실 실수할까 봐 불안하고, 대표의 눈밖에 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아랫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출근하기 싫어 잠을 설치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여기저기서 받은 꽃다발을 잔뜩 들고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서는 그녀를 보며 나는 다짐했다.
이제 다시는 회사에 롤모델을 만들지 않기로.
그녀가 편안하게 주말을 보낼 수 있기를 속으로만 바랐다. 출근을 걱정하며 잠을 설치지 않기를.
나의 롤모델이여,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