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과 선출 사이에서
모든 정책적 결단에는 양면이 있다. 원전을 없애고 화력 발전을 줄이면 전기 요금이 오른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사회가 환경 오염 및 방사능 누출 위험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감소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되어 선거에 참여하게 되면, 그때 정책적 결단이 나온다. 공공 정책에 참여하는 엔지니어는 Why? 대신에 How? 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까라면 까야 한다. 엔지니어 개인의 의견은 투표장에서 시민으로 기능할 때에만 유효하다. 이는 비단 엔지니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기술이 아닌 다른 분야의 사람들 역시, 정책적 결단을 본인 및 본인이 속한 집단이 내린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즘 기사를 보니 이 나라 일부 관료 엘리트는 공무원 답지 않게 독특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데, ‘까라면 까’ 대신 ‘까라면 그것을 부당 압력으로 규정짓고 동영상을 찍어서 유튜브와 고파스에 올리자’는 식의 태도 말이다. 신재민 같은 인간 군상을 많이는 아니더라도 제법 보고 겪은 것 같다. 누군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면 진영이나 정체성 논쟁으로 들어가 상대를 악마화하고, 자신을 숭고한 전사로 포지셔닝하는 인간 군상 말이다.
신재민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대한민국 행정부 수반이 되는 대통령은 선출직이기에, 시험 보고 들어온 기재부 일개 직원 나부랭이와 비교해 더 큰 정책 수립 권한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 재민이는 “내가 경제 엘리트인데 왜 시발 내 말 안듣지?”하고 흥칫뿡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건 사실 재민이의 사정 내지 재민이에게 겸손을 가르치지 못한 환경의 탓이다. 혹은 백번 양보하여 재민이 말이 다 맞다 하더라도, 정책 논쟁 대신에 “최고 권력 기관 청와대의 압력과 불의에 항거하는 나”라는 시나리오를 택한 재민이의 행동 역시 그냥 우습기만하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영화를 너무 많이 봤거나, 군중 심리에 지나치게 노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신재민 같은 군상을 많이 보았다고 했는데, 사실 고파스에서 제일 많이 보았다. 이제는 탈퇴하여 굳이 그 사이트를 들어가지 않지만, 고파스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저마다 카르텔을 하나씩 그리고 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파스 밖에도 재민이 같은 친구들이 있다. 제 자존심 때문에 객관과 합리를 내팽개치는 사람들 곁에는 언제나 재민이가 함께 한다.
재민과 같은 개인의 품성 이야기를 다 떠나서,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지난 세월 기재부 출신 관료들의 엘리트주의는 견고하여 선출된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장관 자리에 누가 들어서건, 행정고시 출신 엘리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관료들이 경제 정책을 독점하면서 시민은 관객으로, 국가는 관료의 총알받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정치와 무관하게 시민들은 경제 정책을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경제 관료는 시민과의 관계맺음에 있어 은유가 아닌 직접적으로 유튜버 - 구독자의 관계를 만들어냈는데, 여러모로 신재민은 상징적인 인물이라 해야겠다.
물론 관료들이 계속해 살아남았던 것은 정부 정책을 시행하려는 척 정도는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철딱서니 없는 신재민이 아닌, 노회한 고위 경제 관료들인지 모른다. 어느 건물 고위직 관리 사무실에서 ‘애새끼 관리 하나 못해서 이게 뭐냐’는 소리를 듣고 있는 중년의 가장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