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군역을 애증 하는가.
요즘 유튜브 가짜사나이에 미쳐있는데, 별 건 아니고 BJ나 스트리머들 데려다가, UDT 출신 교관들에 의해 훈련받는 프로그램이다. 나 역시 아주 고상한 콘텐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무슨 하트시그널이니 뭐니 하는 프로그램을 보거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것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가짜사나이에 열광하는 나를 성찰하니, 아마 내게도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문화적 특이점이 생긴 것인가 하고 체념한다. 도대체 군역에 대한 애증은 도무지 가실 줄을 모르나.
이를테면, 공혁준이란 분(체구가 우람하시다.) 구르는 것을 보면 과체중 사병이 유격훈련받던 시절 생각에, 간질간질거리는 이상한 쾌감이 고개를 쳐든다. 나는 소위 ‘폐급’은 아니었으나, 국가가 군인에게 요구하는 뛰어난 운동능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유격 체조를 깡으로 버텼지만, 정작 쉬어가는 장애물 앞에서는 쩔쩔매곤 했다. 뚱뚱한 몸은 살집 속에 시선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뭐라 하는 사람 없어도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고 만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착지하는 것을 못해서 그냥 엎어졌던 기억, 밧줄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해 입수했던 기억, 중대끼리 맞붙은 참호 격투에서 물을 먹던 기억.
그토록 군역 하던 시절을 자꾸 되새기는가 조금 고민해보니, 살면서 21개월, 637일 동안 간절하고 꾸준하게 무엇인가를 소망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 또래와 비교해도 순탄하기 그지없던 삶의 궤적이었기에, 무엇인가를 간절히 소망한 기억이 많지 않다. 전역 하나만큼은 정말 간절히 소망하던 무엇이었다. 남자의 첫사랑 어쩌구 같은 이야기처럼, 무엇인가 간절히 소망해본 인간은 간절히 소망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려고 한다. 온전하지 못한 지식과 사유 속에서, 결정하고 행동한 것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눌러앉는 그 순간이 향냄새 맡기 시작하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얽매여버린 과거의 시점을 끌어안고 사는 편이다. 아마 이 모순된 태도가 애증의 근원이겠다.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면,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다.” 이에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하지만 이는 증명할 수 없는 말이다. 비벼 끈 담배에도 향기는 남는 법이니, 허망함이라는 흔적이라도 남겼다면 그것은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라진 것은 이미 사라져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시간은 손아귀에 쥔 모래알처럼 흘러나가고, 5년 전의 637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학원에서의 시간도 흘러나간다. 나는 또 조금씩 변하겠지만 동시에 어떤 순간에 얽매이게 될 테다. 필연적인 얽매임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함께하길 바랄 뿐. 아니, 필연적인 얽매임 속에서 가급적 좋은 사람들과 가급적 좋은 시간을 함께하길 바랄 뿐. 가급적이라는 단어만큼 앳된 티를 덜어주는 부사가 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