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학생사회가 높은 장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들어오기 어렵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만,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보여서 그렇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듯 하지만, 최근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을 빼놓고서는 학생사회 바깥의 누구와도 밥 한 번, 차 한 잔 함께하는 날이 드물다. 수업이 끝나면 420호로 돌아가 밤새도록 타자를 치다가, 해가 뜨기 전에 허겁지겁 집에 돌아가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다.
오늘은 오랜 친우가 연락을 해와, 금요일 안암에 갈 터이니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까페에 가서 무슨 차를 마실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였겠으나, '학관 까페가 7시에도 열던가...' 같은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멀리서 오는 친우에게 이 무슨 민폐인가. 학관 까페 아메리카노는 음료가 아닌 링거에 가깝지 않던가. 아아, 내가 먼저 친우들에게 안부를 묻는 날이 너무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나도 어서 '작주여군군자관 인정번복사파란'하며 친우들에게 술을 따르고, 책이나 뒤적거리며 '세사부운하족문 불여고와생가찬'하고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싶다. 눈 내린 수원을 뒤로하고 안암에 왔는데, 다시 수원에 내려가면 벚꽃이 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아 임기가 끝났을 땐 친구가 몇 명일지.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다보면 내 마음자리는 지정좌석제로 운영되며,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누군가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오랜 친우로 자리잡은 사람들이야 언제나 예약석 표시가 되어있다지만, 금세 떠날 것만 같은 불안한 인연들도 있단 말이다.
나는 방금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누군가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고 썼다. 동시에 몇 년전의 나였다면, 같은 인식을 두고도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누군가는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슬퍼질 때가 있다.'고 썼을 것 같다. 순간순간 남겨진 기억들로 인해 흠칫하는 나날들의 가짓수가 늘어났을 뿐이다. 인간이 순간을 산다고는 하지만, 이제 '흠칫'에 의미부여를 하기엔 조금 머쓱도 하다. 단단해진 고집과 뱃살이 "내 삶이 획기적인 방향 전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다시 금요일에 만나기로 한 친우를 떠올린다. 그는 내게 10년도 넘게 남아있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잃는 경험 속에서, 나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반대로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는 경험 속에서, 나는 또 오랜 친우들에게 각별함을 느끼고 말았다. 아아 늙어죽을 땐 친구가 몇 명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