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개그맨 유세윤 씨는 인스타그램 셀럽 여성들(주로 노출이 포함된 본인 사진을 업로드하는)을 흉내내는 듯한 게시물을 올리곤 했다. 위근우는 유세윤의 게시물을 두고, “이게 재밌냐? 이건 누구에게나 욕먹기 좋은 만만한 여성들을 상대로 하는 얄팍한 개그이며, 여성 혐오적이고 약자를 패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하였다. 위근우의 말을 빌리자면, 유세윤의 개그는 위근우에 의해 ‘폭력의 동참’으로 호명된다. 하지만 인스타에 헐벗은 사진을 올리는 여성들이 언제부터 누구에게나 욕먹기 좋은 만만한 여성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유세윤 씨가 ‘까치블리’라는 태그와 함께 올린 게시물에서 여성들을 조롱하려 했다는 의도도 찾기 힘들다. 위근우는 ‘노출을 통해 인스타 셀럽이 된 여성’을 흉내내는 ‘중년 남성 개그맨’에게서 의외성보다는 폭력의 냄새를 맡았다. 이 정도면 ‘폭력 탐지견’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 ‘폭력’의 정의가 나와는 좀 다른 것 같다만.
유머는 인간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생각보다 고차원의 예술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코난 오브라이언이 멍청함과 똑똑함이라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하는 순간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도덕과 비도덕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사실 유세윤이 선보인 유머는 이렇게까지 따지고 들 이유도 없다. 그는 유머를 빚는 가장 쉽고 간편한 도구인 ‘공감대와 의외성’을 갖고 게시물을 만들었다. ‘인스타 셀럽 여성’들의 계정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공감대)를 바탕으로, ‘중년 남성 개그맨’의 재현(의외성)을 더한 것뿐이다. 이를 두고 폭력의 동참이라 일갈하는 위근우의 모습이야 말로 유머러스하다. ‘연예인의 SNS’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폭력의 동참’이라는 의외성을 더하고 있지 않은가?
채 분이 풀리지 않은 위근우는 이어서, 대기업 오너나 강연 팔이, 얼짱 유튜버와 주식 부자 등이 해악이 크므로 적절한 개그의 소재라 일갈한다. 당연히 이 말의 행간에는 인스타그램 셀럽 여성들에게도 해악이 있다는 뜻(도대체 뭐가…?)이 담겨있지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자. 내가 위근우에게 짜증스러운 것은 예술이나 창작이 특정 방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본인만의 신념을 바탕으로 “왜 이런 소재는 제재로 다루지 않느냐!” 일갈하는 뻔뻔함이다. 위근우와 같은 폭력 탐지견들은 힙합과 개그, 영화와 드라마 전반에 걸쳐 이런 지적만을 일삼았다. 그들 행동의 눈부신 성과는 애꿎은 디자이너들이 손가락 모양을 피해 다녀야 하는 시국으로 드러난 바 있다.
위근우의 간교함은 언제나 마지막 문단에서 빛을 발한다. 과거 발언을 슬쩍 언급하며 앞서 만들어진 논지의 빈틈을 선동에 호소하여 메꿔나간다. 나 역시 유세윤 씨의 옹달샘 팟캐스트에서의 논란들은 명백한 여성 혐오라고 생각한다. 장동민의 발언들은 저열하고 천박했으며, 여전히 옹달샘이란 팀에 큰 애정이 생기지 않는 이유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세윤의 “개그가 더 새롭고 건강한 웃음을 시도하지 않았다”며 ‘폭력의 동참’ 딱지를 붙여대는 위근우에 동의하기 어렵다. 전에는 위근우와 그 동지들이 더 새롭고 건강한 사고로 세상을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이제는 ‘유머는 유머일 뿐’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