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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인 단상(21.12.05)


1. 아케인의 성취는 위대하다. 이제야 비로소 세계에서 가장 인기많은 게임의 서사 중에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 생겼다. 서사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참신하지 않아도 매력적이고, 잔인하지 않아도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탄탄한 서사의 힘은 응축된 끝에 결국 각각의 캐릭터에서 폭발한다. 오리지널 게임의 배경을 그다지 해치지 않으면서도, 각 캐릭터의 역사와 멋이 제대로 새겨져 있다. 고작 9편짜리 시즌 하나로 8-9명의 캐릭터를 아로새긴 성취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2. 역시 메인 빌런 역할을 맡고 있는 실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빌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한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 강한 신념, 인간적인 여린 모습, 장엄한 퇴장 정도이다. 실코의 액션이랄 것은 거의 없지만, 그의 대사 한 줄 한 줄은 충분히 압도적이다. 그의 신념과 인간적인 부분은 서로 맞물려 있다. “밴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중얼거리며 동상 앞에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실코의 퇴장은 이 시리즈 최고의 장면 중 하나다.


3. 징크스는 극 내내 지독히 외로운 인물이다. 극의 모두가 직조하는 아름다움과 지켜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파괴 그 자체인 인물이 징크스다. 징크스는 실코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정하고, 시리즈 내내 어렵게 쌓아올려 가던 두 지역의 평화에 초강력 초토화 로켓을 선사한다. 징크스의 파멸적인 헤비메탈은 극을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간다. 동시에 너무나 아름답다. 줄초상이 예정되어 있는 파멸에서조차 지독한 아름다움이 있다.


4. 동시에 아케인은 지난 몇년간 작위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삽입으로 인해 지속되던 조악한 컨텐츠에 대한 비판 또한 멈춰세웠다. 극 중 최고 권력 기구인 의회의 구성원들은 유색인종은 물론 요들에, 기계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섬세하고 여린 남성 캐릭터들과 억세고 강렬한 여성 캐릭터들은 전혀 어색함이 없다. 물론 그 중 백미는 바이와 케이틀린의 커플링이다. 아케인은 그간 반복되어온 논쟁을 끝낼 수 있다. 개발자들은 다짜고짜 정치적 올바름을 삽입시키는 것만으로 본인의 역할을 끝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소비자들은 정치적 올바름만을 두고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멍청한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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