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30
아침 기차를 타고 집에 가려고 서울역에 가는데, 1호선 열차 안 공기가 바깥보다 싸늘하다. 어딘가 다급한 표정의 이들은 하나같이 캐리어를 말아 쥐고는 결연하게 지하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당초 나의 계획은 대합실 계단 아래 주차장 입구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으나,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뛰고 말았다. 계단을 한 걸음에 두세 개씩 오르며 어제 하체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게다가 서울역 1호선부터 대합실까지 2분 남짓한 경주를 마친 동지들과 나는 타는 기차가 달랐다. 내가 타려는 무궁화호보다 3분 일찍 KTX가 있었고, 나는 허탈해져서 대합실 계단 아래를 흘겨보다가 체념하고 기차에 탔다.
나는 아무래도 애연가이며, 온갖 것을 다 혐오하는 인간들에 맞서 흡연자들을 지켜낼 언어를 갈망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흡연자들을 탄압받는 거대 공동체로 비유해왔으며, 주류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흡연자 공동체론을 지켜낼 생각이다. 현재 흡연자는 불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가 이어져있으며(“불 좀 빌립시다.”라는 말은 하지만, “불 갚으러 왔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불을 빌리고 빌려주는 거대 흡연 공동체의 존재를 추론케 한다.), 그중 가까운 몇몇은 서로 담배 자체를 공유하기도 한다(“이번엔 네 것 좀 피자.”). 기본적으로 담배는 서로를 이어주는 상징으로서 촛불보다 더욱 애틋한 측면이 있다. 담배만 충분하다면 단 한 명의 담뱃불로 여럿이 담배를 태울 수 있으며, 사실 돗대라 할 지라도 이를 서로 돌려 피는 것이 군인들의 오랜 문화였다.
대합실 계단 아래 흡연구역은 일종의 자치 공간이다. 대합실 계단 아래가 자치공간이 되어버린 이유는, 기존 흡연구역이 코로나 검진소 운영을 위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기존 흡연구역을 대체할 만한 공간이 제공되지 않았지만, 흡연자들은 적당히 눈치를 보며 계단 아래 하나 둘 모여 담배를 태웠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 대합실 계단 아래에서 담뱃불이 붙기 시작한 이래로 적어도 한 둘은 언제나 담배를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자치공간은 외부로부터 흡연자를 지킬뿐더러, 동시에 흡연자 개개인을 제어하기도 한다. 쓰레기통조차 찾기 힘들어 쓰레기봉투에 담배꽁초를 찔러 넣으러 돌아다니다 보면, 이 도시와 나라 전체가 쓰레기통인데 그냥 길바닥에 버리는 것이 어떤가 싶기도 하다. 이런 개인의 일탈 역시 자치공간의 존재로 인해 제어될 수 있는 것이다. “화장실 올라가서 버리자”는 누군가의 한 마디가 있을 수 있고, 누군가가 올려둔 종이컵이나 굴러다니는 박스 등에 담배꽁초가 쌓이기 시작하여 비교적 정돈된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강을 건너며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동이 트는 중이다. 새벽 기차가 오랜만이었는지, 한강의 야경이 새벽에도 있음을 깨닫고 드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적었다. 객실에도 이제 사람이 제법 찼다. 큰 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충전하는 아저씨가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건너편에서 바닥에 침을 뱉고 신발로 닦는 것을 반복하는 할아버지보다야 덜 당황스럽다. 이쯤 되면 아까 계단을 오르는 중에 바지가 찢어졌으며 그 덕에 무척 시원한 기분이라는 것 정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개 같은 수원역에 이제 도착했고, 흡연 공동체 같은 좆같은 소리는 제쳐두고 이제는 그냥 역전 한 구석에서 담배를 태울 수 있다. 요즘 너무 쉬었더니 연휴가 연휴 같지도 않다. 그래도 오랜만에 근황 한 편 남긴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