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스파이 패밀리

그래, 일단 맞닿았으면 된 거야

요즘 스파이 패밀리가 유일한 낙이다. 토요일 아침이 주말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스파이 패밀리 최신화가 공개되는 일요일 새벽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영업을 하고 다니고 있고, 오늘은 추천해준 이가 한 편 봤다는 연락 한 통에 펄쩍 뛸 정도로 기뻐하기도 했다. 모두를 만나고 다닐 수는 없기도 하거니와 왜인지 내 글을 챙겨보는 이상한 여러분을 위하여 몇 자 영업글을 적는다.


살다 보면 서로 다른 개인의 반경이 겹쳐 놓이기도 하며, 교집합이 생기는 일이 있. 그걸 보통 인간관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지만,  크기는 관계마다 제각각이다. 누구와는 손톱만큼조차 부담스럽지만,  다른 누구와는 생의 전부를 의탁하고 싶어 한다. 또한 누구에게는 엄격한 양반이, 누구에게는 칭얼대는 아이일 수도 있다. 관계마다 내보이는 인격이 서로 다른 탓이다. 이렇듯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교집합이 너무 많다 보니, 관계의 우열을 가리고 진실성을 묻는 것이 모두에게 일상이 되었다. 많은 부분을 서로와 공유하고 있다면 진실한 관계인가? 특정한 삶의 즐거움이나 슬픔을 공유하는 것이 진실한 관계인가? 명제를 부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반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이자 모두가 서로가 공유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이들은 진실한 관계를 맺을  없나?  ‘스파이 패밀리 진실한 관계를 박제하고 이에 경향성을 부여하려는 이들에게 던지는 반례다.

스파이 패밀리의 주인공들은 포저 일가다. 아버지 로이드 포저는 스파이, 어머니 요르 포저는 암살자, 마지막으로 딸 아냐 포저는 초능력자다. 이들은 급조된 가족이고 거짓된 가족이다. 서로의 정체를 아는 것은 독심술 능력을 지닌 딸인 아냐 포저뿐이다. 이들의 관계는 거짓말로 시작되었지만, 박제된 관계는 아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분명 꿈틀대고 있으며,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에게 마음을 흘려보내고 있다. 이들의 교집합은 보잘것없는 영역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의 관계는 꿈틀거리는 걸까? 조그마한 교집합에서 왜 서로에게 신경을 쓰게

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서로 맞닿았기 때문이다. 서로 맞닿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인간은 꿈틀거리는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의지나 능력이 관계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아니다. 맞닿았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관계는 인간을 이끌어 나간다. 그것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장엄한 자기 통제의 상실이자, 위대한 방황의 시작이다. 우리는 스파이 패밀리를 통해 인간들이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가 아니라, 관계가 인간을 어떻게 엮어내는지 본다.


https://youtu.be/CbH2F0kXgTY


앞서 언급했듯이 극을 보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두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는 딸인 아냐 포저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땅콩인데, 스파이 패밀리의 오프닝 주제가가 Mixed Nuts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냐가 땅콩이라면 포저 일가는 여러 견과류가 한 데 섞인 Mixed Nuts인 것이다.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봉지에 담긴 너츠 같은 세상에서는/누구나 각자 만난 누군가와 서로 다가붙어 있어/거기에 뒤섞인 우리는 땅콩처럼/나무 열매인 척하면서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땜빵투성이의 일상이지만/여기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어/이 진실만으로도 속이 더부룩해/이 한 줌의 기적을 곱씹으면서 가’


오프닝 주제가가 잘 표현했듯이, 포저 일가의 이야기는 한 줌의 기적일 뿐이다. 스파이 패밀리는 치밀한 복선이나 처절한 싸움,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이 세 사람이 맞닿았다는 그 한 줌의 기적을 곱씹게 할 뿐이다. 모두가 모두에게 악의를 드러내는 것이 일상인 세상에서, 그래서 서로가 점점 더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똑똑한 세상에서, 우리가 맞닿았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것을 곱씹게 할 뿐이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기적이라도 그것은 축복이다. 아니 오히려 한 손에 쥘 수 있는 기적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스파이 패밀리는 그런 작품이다. 얼렁뚱땅 맞닿은 탓에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소리 하나 싶어서 끝까지 읽은 여러분께 다시 한번 추천드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한 ‘조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