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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 민방위 아저씨들

남도단박, 첫 번째 이야기

전화를 끊고 나서야 목포역 역 광장에 짙게도 깔린 어둠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여덟 시가 넘어 아홉 시로 향해가는 시각이니 어쩌면 어둠은 한참 전에 깔려있었는지도 모르지. 취한 탓에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같다. 다섯 시간 전에도 나는 목포역에 있었다. 그때는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건만, 비슷했다. 무언가에 취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다는 점만큼은 같았다.


연락을 하자마자  걸음에 목포로 달려와준 P   군대 선임이었다.  시가 조금 넘은 시각부터 술자리를 갖다가 이제  헤어 참이었다. 간만에 만난 사람이었지만 P 알아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물론 표정은   좋아 보였다. 부대에서는 항상 억울한 표정을 짓고 살았던  같은데, 이제는  여유가 있는  같다고 지레짐작했다. 듣자 하니 고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찌저찌 자리 잡고 살아가는 듯했다. 우리 나이 또래가  그러려니 했다. 누구 하나  살고 있다는 소식만으로 위로가 되는 법이다.


사는 얘기를 다 하기도 전에 민방위 아저씨들끼리 도착한 곳은 민어가 유명하다는 한 음식점이었다. 사실 목포로 여행지를 정한 이유 중 하나가 민어였다. 이제부터 철이라는 민어를 맛보고 싶었고 가급적이면 다양하게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 주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P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였으니, 미안함도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이 사내놈들의 맛 아닌가, 하고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수식어를 가져다 대었다.



둘이서 민어를 앞에 놓고 술을 까대기 시작했다. 이보다 맛있는 정식을 먹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민어는 훌륭했다. 부드럽고 기름진 회도 좋았고, 야채와 함께 무쳐낸 회무침도 좋았다. 처음 먹어본 부레의 맛은 충격이었다. 계란물을 입혀 부쳐낸 전 또한 촉촉함을 간직하여 일품이었고, 마무리로 내어주는 탕은 깔끔하지만 진했다. 그 덕에 낮부터 소주를 세 병은 먹었고 담배도 반갑은 태운 것 같다. 원래 담배를 태우지 않던 P는 고단한 삶의 조각이 있었는지 나만큼이나 담배를 태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어찌 보면 그 시절이 더 좋았지.


“돌아보면 그때가 재밌었지.”라는 대사가 얼마나 쓸모없는 말인지는 잘 알지만, 그 대사를 뱉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기 힘든 것이 이런 술자리이다. 언제나 이런 술자리는 파괴적이고 또 소비적이다. 술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심득이랄 것이 있지도 않지만, 지난 과거의 기억을 물처럼 써대며 웃음과 맞바꾸는 것이다. 군대 얘기를 한참 하다가, 또 그때 그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다가,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이 술잔에 술을 따르듯 흐르고 넘쳤다. 이제 다 커버린 척을 하면서 으쓱대는 꼴들이 옆에서 보면 퍽 우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천진해 보였다면 그것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P는 날더러 멍콥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군대 이전에나 불리던 별명이었으니 퍽 오랜만이다. 생각해보면 그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는 사람은 이제 정말 거의 없다. 그리고 P 특유의 호남 말씨가 섞인 억양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아예 없다. 요즘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리고 있지? 오빠나 형님 같은 말 말고는 뭐가 있었지? 명석씨 같은 사무적인 말 말고는 또 뭐가 있었지. 괜히 쓸쓸해졌지만, 그게 한 걸음에 달려와준 사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목포항을 걸으며 다시 또 담배를 태웠고, 사진을 몇 장 부탁해 추한 몰골 뒤로 목포항을 비췄다.



낙지를 먹어보겠다고 두 번째 식당으로 향했지만, 이미 많이 취한 탓에 술도 음식도 많이 먹지는 못했다. 낙지 요리는 나쁘지 않았으나 진미라 할 것은 못되었다. 테이블에 앉아 주정을 부리다가 음식을 많이 남기고 역으로 다시 향했다. P와는 주말에 서울에서 다시 보기로 했으니, 반드시 잘 대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혼자 역 광장에 남겨져서는 전화를 걸었다 또 전화를 끊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조금 징징거렸다고 믿고 싶다. 목포에서의 일정이 전부 끝났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술자리의 재미는 빠르게 휘발되었고 피곤이 엄습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어딘가 두 동강이 난 것 같았다. 여행은 언제나 무엇인가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남기고 오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여행다운 여행이 있었나? 기차를 탈 적에 승무원을 붙잡고서는 ‘두 동강 난 사람에게도 오만 원 넘게 기차표 제 가격을 받아야겠소?’ 묻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용산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실족을 가장하여 굴러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많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에 얌전히 1호선을 탔다. 생각만으로도 정말 많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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