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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독은 쌓여야 맛이다

남도단박, 두 번째 이야기

번잡스러운 식당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차량 엔진경고등 문제로 차량을 교체받아야 한다고 했다. 택시비 지원을 어떻게 하겠다, 견인 처리를 어떻게 하겠다 하는 말을 듣다가 짜증이 났다. 일단 밥을 먹고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식당은 가정집을 개조한 것처럼 보였다. 1호실부터 8호실까지 손님들이 방바닥에 앉아있으면, 종업원들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2인 상이 기본이라는데 혼자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저씨, 저희는 2인 상이 기본이에요!” 이상한 대답이었지만, 바쁘게 대기 손님 명부를 쳐다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시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식당 주인들이 젊은 남자 손님을 반기는 이유는 소심함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2인 상 하나 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자리에 가 앉았다.


잠시 후에 남자 종업원 둘이 식사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이 한 상의 주인공은 연탄불에 구워낸 양념돼지고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상을 받아 들고 처음 느꼈던 것은 주조연이 명확하지 않은 군상극에 가깝다는 생각이었다. 잘 구워낸 조기구이가, 양념 좋은 두부조림이, 살짝 삭힌 홍어회는 대체 왜 주인공일 수 없단 말인가? 심심한 계란말이도, 달달한 양념게장도, 구수한 배추 된장국도 조연이라기에는 훌륭했다. 공기 가득 담은 쌀밥은 서울에서 보기 힘든 것이었다. 크게 한 술 떠서 연탄불에 구워낸 돼지고기를 한 점 올리고 툭툭 썰어놓은 생양파를 얹어 한 입 크게 먹었다. 그 뒤로 몇 분간은 정말 정신없이 밥만 먹었다. 흔히 말하는 밥심이란 것이 정량화될 수 있다면, 이 한 상은 얼마쯤인가? 서울에서 먹던 제육볶음을 떠올리면 아찔해졌다.



택시를 타는 일에 관해서는, 서울과 강진의 역학은 반대가 된다. 서울에서는 길거리를 헤엄치는 빈 차에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지만, 강진에서 택시는 잡는다는 개념보다는 부른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대화를 나눴던 강진 사람이 식당 아주머니였기에, 소심한 목소리로 개인택시 번호 갖고 계신 것이 있냐 물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차 걱정을 해주시더니 거듭해서 여러 개 번호를 불러주셨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택시를 부를 수 있었고, 나는 빌린 차가 무사히 견인되기를 바라며 강진에서 목포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기사님은 유쾌하신 분이었다. 나는 사실 택시기사와의 대화를 꽤나 즐기는 사람이다. 175에 90킬로가 넘는 나는 택시기사의 무례한 태도를 경계하기에는, 상당히 거구인 채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강진에서 만난 택시기사님과의 대화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방언을 분석하는 즐거움이었다. ‘그랑께’는 일종의 문장을 여는 단어이거나, 앞 문장과 뒷문장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언제나 주어는 ‘우리가’ 였는데, 의미를 분명하게 하자면 그것은 ‘내가’로 시작했어야 하는 문장이다. 우리의 뜻을 나와 기사님으로 잡는다면, 나는 부산이나 서울까지 택시운전을 해본 적이 없고 59만 km를 달린 택시가 정정하려면 1만 km마다 오일을 갈아줘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강진 택시기사 일반이라고 하기에도 합리적이지는 않다. 모든 강진 택시기사의 아드님들이 목포경찰서에서 의경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과속 기록을 확인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유쾌한 드라이브를 마치고 감사인사를 전한 후에, 오늘의 두 번째 k3에 타서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일정대로 움직이려거든 바로 차를 몰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 식당 아주머니에게서, 택시 기사님에게서, 남도의 어떤 모습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유로웠다. 오히려 시동을 걸고 멀쩡한 계기판을 보고 나니, 긴장이 풀려 식후의 피곤마저 찾아왔다. 한 숨 자고 일어날까 싶었지만, 몸을 굴려야 보람찬 여행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독은 쌓여야 맛이다. January Embers를 크게 틀어두고 다시 한번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시끌벅적한 드라이브와 함께 강진의 어느 찻집으로 향했다. 조금 불안하지만 여전히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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