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단박, 네 번째 이야기
‘해피다잉스쿨’이라고 적힌 건물 뒤에 주차를 했다. 강진에 안락사 운동본부가 있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은 삶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뭐 그런 자기 계발 아니겠나 싶었다. 그렇다면, 다산초당 입구에 이 해피다잉스쿨이 있는 것도 나름대로 그럴싸한 맥락이 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산초당에 올랐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은 내 비루한 체력을 감안해도 험하다고 해야겠다. 그것은 산세의 험악함이라기보다는, 미처 정비되지 않은 길의 험악함이었다. 여기저기 삐꺽거리는 나무판자를 밟아가며 오른 초당 앞에서 헉헉거리고 있으니, 다산이 보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족 단위로 여행을 온 이들이 한 무리였다. 이런 곳을 방문하는 부부와 아이들의 조합은 대개 전형적이다. 아이들은 유적에 관심이 없고, 부모 중 한쪽이 관심을 주입하려 애쓴다. 나머지 한쪽은 대개 먼 곳을 바라보며 그 실랑이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씀의 현현처럼, 금방 사라진다. 그러다 보니 결국 한 두 사람만이 초당 곁에 남게 되었고, 그게 둘러보기에는 훨씬 편했다.
함께 다산초당을 둘러보던 아저씨는 한 손에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 서적을 쥐고 있었다. 내 짧은 기억으로는, 다산초당에 대한 유홍준의 평은 그리 좋지 못하다. 지금의 멀끔한 다산초당은 왜 초당이 아니며, 왜 이런 형태로 복원되었는지에 대한 툴툴거림이 꽤 있었다. 다만, 유홍준 역시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바라보는 산세와 저 너머의 남해바다까지는 뭐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저씨는 유홍준의 말을 따르는 듯, 초당을 뒤로하고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얼른 그를 따라해 보았다. 어딘가 매듭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이 편안해졌다.
본인의 성을 따 정석이라고 적어놓은 돌을 옆에 두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가 겪었던 서울의 삶에서 유교적 맥락을 제한다면 무엇이 남았나? 모시던 왕이 그를 너무도 사랑한 탓에 그는 정조가 떠난 이후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던 운명이 모시던 왕에 의해 유예된 것일까? 정조가 떠난 이후에 그는 이곳에서 학문을 마저 닦았고 차를 마저 내렸다. 그것은 유배였으나, 과연 구속이었을까? 정말로 서울의 삶이 이곳보다 자유로웠을까? 시시한 인간들 속에 파묻혀서 시시한 인간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념적 시선을 잃어버린 개인주의자들, 제 욕심과 화해하는 대신 위선의 품에 안겨 눈치만 보는 기회주의자들, 방황하는 자아에 취해 안락함만을 쫓는 속물들. 그 틈에서 정말이지 토할 것만 같다. 그래, 다산은 정말로 그들이 역겨웠을 테다.
하지만 동시에 다산은 두려웠을 것이다. 구속이라는 낱말은 그 어감보다는 모질지 않다. 자유라는 낱말은 그 어감보다는 친절하지 않다. 시시한 삶이라 하여 왜 사랑할 수 없겠나? 그 시들어가는 꽃잎을, 꺼져가는 불씨를 왜 사랑할 수 없겠나? 찻잎은 한 번만 우려내지 않는다. 여러 번 우려낸 찻잎의 빛깔이 처음 그것만 못한 것이 아니다. 다른 빛이고 다른 향이다. 이 모두와 이별하고 산에 누웠으니, 어찌 두렵지 않았을까. 그것은 외로움과도 다른 무엇이라,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해 괴롭히겠지. 그 역겨움과 괴로움을 떠올리자니, 차라리 넘어지고 싶다. 그래야 사랑하는 마음 가진 채 마저 사랑할 수 있겠지.
잠깐 심호흡을 하고, 여전히 조용한 전화기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한번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를 밟아 내려왔다. 굵은 나무뿌리와 어두운 하늘을 뒤로하고 내려온 길에 매점이 있어 물을 하나 샀다. 다산초당에서 빠져나와 해피다잉스쿨 앞에 주차한 차에 잠시 기대고 섰다. 피곤했다. 숙소에 간다고 해도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피곤한 마음 가진 채 마저 피곤한 밤이 될 것 같아, 담배를 하나 더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