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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17.05.02)

동지, 사람인

하나마나 한 뻔한 소리를 늘어놓고 내가 쓴 문장에 취해 뻔한 소리를 계속해 이어가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 능력이야 말로, 스스로에게서 구원을 찾는 이들의 능력임을 깨닫곤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덕업이 일치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야할까.

다만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말은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어색하기만 하다. 내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 혹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거니와, 내 가진 선천적인 일그러짐을 일순간에 해결해 나갈 어떤 기제를 상상하는 것은 내게 난망하기만 하다. 구원 같은 것은 바란 적도 없고,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마크툽. 세상 만사 그렇듯이 내게 절망은 결국 언젠가 흩어질 구름이고, 그 기다림 속에서 미학을 찾아야 한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당신의 일상의 가장 작은 조각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나는 언제고 그 곁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절망 속에서 걸어나오는 출구에서 끊임없이 당신을 향해 손짓할 것이고, 마침내 걸어나온 당신에게 환한 미소와 뜨거운 박수를 쳐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에서 당신이 구원의 그림자를 맛보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 고개를 숙인 신의 모습 아닐까. 그 모습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동지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게 동지가 서로의 구원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냐고 묻거든,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그저 서로가 무너질 것만 같은 순간에 등을 기대고 선 사람 인자를 두고 나는 동지라 불러왔다. 우리가 굳이 마주보지 않아도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는 서로를 끝없이 응원할 테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동지가 될 수 없다는 그 말을 되풀이하며, 서로 마주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 다음 순간에 주목해야만 했다. 등 뒤의 당신이 나를 밀어올려주길 바라지 않아. 나는 내 가진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울테야. 마침내 우리는 서로 등 대고 있을 필요가 없어. 그렇다면 그 동안 서로 등을 맞대던 우리는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일까. 아니지, 마침내 온전히 일어선 두 사람은 이제 뒤를 돌아 서로를 마주해야 하겠지. 그렇다면 동지란 등을 맞댄 사람들이 아니구나 싶다. 동지란 언제고 마주볼 준비가 된, 그리고 다시 함께 걸어나갈, 그렇게 걸어가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에 다시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인가. 

아아 신은 전지전능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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