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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

제니는 자그마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다. 그는 곧 케네디 센터라는 대형 센터에서 일하게 될 예정인 전도유망한 의사이자, 진심을 담아 치료에 임하기에 환자들에게도 사랑받는 의사다. 그러나 어느 밤, 그의 일상은 조금 변하기 시작한다. 진료시간 이후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턴 후배와 언쟁 중이던 제니는 굳이 나가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는 초인종을 누른 소녀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는 '문을 열어줬다면...'하고 시작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진료실 밖에서 의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일을 시작한다.

제니의 삶은 유연하지만 분명하게 휘어진다. 이를테면, 그는 혹시나 초인종 소리를 놓치게 될세라 아예 침구류를 진료실로 옮겨 버린다. 훨씬 나은 경력과 생활을 보장하는 케네디 센터의 제안을 거절하고, 작은 병원에 남기로 한다. 찾아온 병마에 계급이 어디 있겠냐만은, 삶의 질곡이 그대로 담긴 상처들은 그가 케네디 센터에서 마주했을 환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을 지탱하는 동력은 '언노운 걸', 이름 모를 소녀의 죽음과 그에 따른 죄책감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윤동주, 병원 中


영화는 병원 안팎에서 이뤄지는 진료와 치료의 모습을 늘어놓고, 그 위에 스릴러의 얼개를 풀어나간다. 제니의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복지제도로 근근이 살아가는 늙은 가게 종업원부터, 공사 현장 철근에 다리를 찢기고도 이주민이기에 큰 병원에 가지 못하는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제니를 찾는다. 계속해 반복되는 진료를 거쳐 제니는 사건의 진실에 다다른다. 거듭된 진료의 과정은 동시에 그 스스로를 진료하는 과정이다. 그는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한다. 그는 인간의 죄책감을 서로 나누고 그것을 기꺼이 인간을 향해 사용했다. 결국 제니는 죄책감으로 일어섰고, 인간의 이름으로 끝내 신의 일을 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 '언노운 걸'은 도시의 모서리에서 일어난 구원신화인지 모른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
좋은 이야기가 있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좋은 이야기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나요
요즘도 무섭게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하고 계시는가요
중년의 나이에도 절망과 좌절의 무게는 항상 같은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만난 것 같은 이야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들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나요"


이랑, 신의 놀이 中

영화는 관객들에게 도덕적 죄의식으로 행동하는 인간상을 보여주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선택의 길목들마다 제니는 굽히지 않고 계속 행동한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일상 속의 영웅을 발견하고, 그간의 영웅 서사에 산재한 초인적인 면모를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재구성해야 함을 느낀다. 어떤 신화를 폐기한다는 것이 반드시 인간 이상향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도시의 모서리에서 오늘도 신은 진료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가 끝난 이후로도 계속해 오디오가 꺼지지 않고 일상의 소음을 들려주는 것은 그런 이유다. 영화는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함에 몰입하기 보다는, 그러한 배경을 전시하듯 늘어놓고 그 위를 수놓는 인간의 선택과 신념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다르덴 형제의 전작인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두드러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관객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다시 묻고 그 은은한 미학을 재조명한다.

먼저 영화를 본 친구 하나가 다르덴 형제를 가리켜 미문가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며 현란한 빛과 음악 없이 서사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언노운 걸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도덕과 책임감, 그리고 무던함과 견고함의 미학을 일깨워줬다. 빠르게 소비되는 문장과 대중 매체의 범람 속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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