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정경대 후문이 언제부터 대자보의 요람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미루어 짐작하건대, 정경대학 특유의 강력한 단과대 문화가 그곳을 대자보의 요람이요 성지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1,2학년 시절 교양 수업을 들으러 그곳을 지나며 읽었던 대자보들은 내게 나름의 추억이다. 특히 안녕들하십니까로 뜨거웠던 13년의 겨울, 그곳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로 인해 나 역시 처음으로 대자보를 썼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맡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대자보를 쓰는 것이 일상이다. 어, 그러니까 인권연대국장보다는 작문첨삭국장 내지 대자보연대국장, 그게 아니면 연서명요청국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올해 쓴 대자보만 치면 10장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 중에 게시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사연없는 대자보가 어디에 있겠냐만은, 게시되지 못한 대자보는 사연이 조금 더 길다. 오늘도 게시되지 못한 자보가 한 장 늘었다.
지난 일요일 새벽, 정경대 후문에 붙은 대자보들 중 성소수자 혹은 페미니즘 관련 자보들이 뜯어져 있었다는 제보를 받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거칠게 여러방향으로 난도질 된 자보와 같은 공간의 다른 자보들이 멀쩡한 것을 보며, 입에서는 계속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대로 총학실에 돌아가 자보를 쓰기 시작했다. 몇몇 문장은 다음과 같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존재를 지우려 천박한 테러 행위를 일삼은 자는 어디로 숨었는가? 무지개 꽃이 핀 자리에 심술궂은 밤바람이 그리 했는가?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대자보를 찢었는가? "
"어둠을 틈타 대자보를 찢은 어리석은 자에게 묻는다. 대자보를 찢어낸다 하여 학우들의 뜻마저 찢어낼 수 있겠는가? 대자보를 찢어낸다 하여 학우들의 존재마저 찢어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대, 앞으로 나오라.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라. 더 이상 새벽을 택하여 타인의 조각을 짓밟지 마라. 그대의 행동에는 자유도, 정의도, 진리도, 그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 앞으로 나오라' 라는 제목이 달린 이 대자보는 내가 여지껏 써본 자보들 중에 가장 강경한 어조로 작성되었다. 작성하자마자 몇 명에게 돌려 피드백을 받고, 바로 게시하려 했다. 이번 자보는 찢을 수 없게 나무판에 레이저 각인을 하는 것도 알아보았다. 그런 와중에 총학생회장이 월요일 종합상황실에서 CCTV를 확인해보자고 했다. "뭔 CCTV요? 빼박이구만..." 하고 투덜거리긴 했으나 "알았습니다." 하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월요일 오전이 되어 여러 단체 사람들과 함께 CCTV를 확인하려 종합상황실에 갔다. 열람신청서를 작성하고 CCTV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화면 속에서 대자보의 끝이 들썩들썩 거리다가 이내 펄럭이며 찢겨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화면 가득 넘실대는 바람만이 보였다. 아 정말이지 '무지개 꽃이 핀 자리에 심술궂은 밤바람이 그리 했'구나. 다행인가 싶은 마음과 함께 허탈함이 찾아왔고, 헛웃음을 지으며 훼손된 대자보들을 철거했다.
그 옆에서 캠퍼스투어를 진행중인 학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곳은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어요. 그래서 이 곳을 폭풍의 언덕이라 부른 답니다." 아아, 그래 정대 후문에서 국제관으로 향하는 언덕을 폭풍의 언덕이라 부른다. 캠퍼스 투어라도 한 번 신청해야 하나 싶은 날이다.